부조리는 직시하겠지만, 만능해결사는 거부한다

판사와 형리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문예출판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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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구제하려고 애를 쓸게 아니라 세계를 버텨 이겨내려고 해야합니다.
이것이 이 후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나마 남은 유일하게 진실된 모험이지요.




. 이 책에 실린 두 개의 중편소설에는 형사와 범인이 나오고, 범죄가 발생하고 사건이 해결되지만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뭔가 미적지근한 부분들이 있다. 진실은 밝혀지지만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건이 종결되지는 않는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도 법의 심판을 내리는 게 아니라 범인과 범인을 맞닥뜨리게 해서 그들끼리 결말을 내게 만든다. 탐정은 이야기 내내 추리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뜬금없는 인물이 나타나서 사건을 종결하고 사건을 구해내기도 한다. 그나마 악당들끼리 서로 파국을 맞는 경우야 하드보일드 쪽에선 심심찮게 있는 경우이긴 하지만, 모든 진상이 밝혀지고 이제 노련한 형사의 대역전극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끝까지 무력한 형사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김빠진 느낌마저 든다. 물론 동료가 탐정을 구출하는 경우야 종종 있다지만, 그런 경우에는 탐정이 일부러 힌트를 제공하거나 뒤늦게라도 해결과정에 개입한다. 이렇게 끝까지 탐정이 무기력하게 남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그렇게 뒤렌마트는 추리소설을 의도적으로 비틀었다.


. 누가 뭐라고 해도,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루기에 추리소설만큼 적합한 분야는 없다. 그게 개개인의 문제든 사회의 문제든 추리소설은 언제나 뒤틀림을 다루는 장르이고 사회파든 본격추리물이든 하드보일드든 - 심지어 코지물이나 일상 미스테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추리', 미스테리'라는 용어 때문에 수수께끼 풀이가 필수요소라고 오해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추리소설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뒤틀림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부조리이고 범인은 때로는 가해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그 부조리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탐정은 뒤틀린 부분을 발견해 부조리를 해명한다. 그래서 사회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가들은 추리소설에 매혹된다. 하지만 수수께끼와 탐정이라는 요소로 인해 순수소설과 추리소설간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왜 세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뒤틀려 있는데 굳이 수수께끼로 만들어 더 뒤틀어야 하는지. 왜 실제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음에도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이라는 만능해결사가 존재해야 하는지.


. 그래서 많은 작가들은 추리 장르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반적인 소설에 추리소설의 요소를 차용하는 선에서 그치지만, 뒤렌마트는 추리 장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오히려 추리소설에 일반소설의 요소를 가져온다. 그의 소설의 탐정들 역시 독자들에게 부조리를 알리고 그에 저항하긴 한다. 노형사 베르라하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병자임에도 '판사와 형리'에서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법의 한계를 이용해가며 한평생 권력과 결탁하며 살아온 범죄자를 추적하고, '혐의'에서는 전쟁 중에 나치스 수용소로 끌려온 수용자들을 좀 더 좋은 수용소로 옮겨주겠다는 댓가로 내기 삼아 수술을 자행하고, 지금도 죽어가는 환자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의사와 맞선다. 그러나 베르라하는 법과 도덕의 당위성보다는 한 인간이 가지는 복수심과 그만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진상을 밝혀내고도 무력하게 최후를 기다리기도 한다. 이를 통해 뒤렌마트는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이야기가 보여주는 사건해결이란 결국 현실과는 동떨어진 동화라는 것을 추리소설에 익숙한 나같은 독자들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보드카가 기운을 발하기 시작했다. 실상 환자의 눈에는 저편 창가의 커튼이 마치 사라져가는 배의 돛처럼 부푸는 것이 보였고, 귀로는 밀어올리는 덧문의 달각거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 싶었다. 이어서 한층 몽롱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몸집이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것도 느꼈다.

그러나 곧 열린 창틈으로 무수한 별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노인의 내부에서는 누를 길 없는 용기가 솟아올랐다. 이 세상 안에서 존속하겠다는, 더 나은 다른 세계를 위해 싸우겠다는, 암이 좀먹는 처참한 몸뚱이를 이끌고서라도, 일 년밖에 안 남은 여생 동안 줄기차게 싸우겠다는 용단이었다.


- 혐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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