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성장하는 그 순간을 읽다

진실의 10미터 앞 - 요네자와 호노부(엘릭시르)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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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미 료조는 나쁜 사람이라 변변치 못하게 죽은거야."




하지만 당신이 말하기 힘들다면 제가 말씀드리지요. 다치아라이 씨, 착각하는 건 눈이 아닙니다. 눈은 렌즈에 지나지 않아요. 빛만 있으면 모든 걸 비춥니다. 만약 영상이 일그러진다면 그건 주변 근육 때문입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차단되어 버린다면 그건.... 뇌 때문입니다.

당신이 단순히 눈으로 존재하려 한다면 뇌에 충실해야겠지요. 뇌가 보고 싶지 않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장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바로 당신 직업을 눈에 비유한 제 말에 당신은 동의하지 않았지요?

- p. 304-5. 나이프를 잃은 추억 속에




. 이제는 너무 오래된 일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를 처음 읽었던 건 아마도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이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에도 계속 나온 '소시민 시리즈'나, 그를 스타 작가로 만들어준 '빙과 시리즈'는 둘 다 그 나이 또래의 적당히 풋풋하고 적당히 들뜬 감정선을 잘 그려낸 소설들이었다. 장르는 좀 다르지만 '덧없는 양들의 축연'도 비슷한 느낌이었고. 그러한 요네자와 호노부 특유의 톤은 소설을 읽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 하지만 그 영역을 넘어간 소설들에선 영 어색하고 경직된 느낌을 받았다. '추상오단장'처럼 작가의 어투를 최대한 배제한 채 아이디어로 써내려간 작품이라면 모를까, 의도적으로 소시민과 빙과를 벗어나려던 결과물은 하나같이 뻣뻣한 느낌이었기에, 한때는 어쩌면 이 작가는 뭘 써도 고바토나 호타로를(사실 그 둘은 작품을 바꿔서 나와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판박이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치아라이 마치가 나오는 '안녕, 요정'이나 '왕과 서커스' 같은 '베루프' 시리즈에서도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고.이 책 역시도 별 기대 없이 고전부 시리즈 신간이 나온 김에 함께 산 책이었는데, 같이 읽은 '이제와서 날개라 해도'도 상당히 좋았지만, 이 작품이 훨씬 더 기억에 남았다. 지금까지 읽었던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꼽을만한 소설이었다.


. 베루프 시리즈의 세 번째 소설인 이번 작품에서 주인공인 프리랜서 기자 다치아라이 마치는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이면을 들춰내는데, 표제작인 첫 사건 '진실의 10미터 앞'부터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간결한 추론을 통해 이뤄지는 추리가 돋보인다. '이름을 새기는 죽음'이나 '나이프를 잃은 추억 속에', '줄타기 성공 사례' 역시 깔끔한 추리와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잘 어우러져 있다. 그동안의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들이 영 서툴게 느껴졌던 이유 중 하나가 인물도 설정도 다른데도 여전히 빙과나 소시민 시리즈의 청소년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때로는 과하고 때로는 오그라드는 위화감을 줬기 때문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전작들과 달리 다치아라이 마치의 캐릭터를 확실하게 잡고, 다치아라이 마치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더 이상 나이 든 호타로가, 나이 든 고바토가 아니다. 그런 마치의 목소리가 가장 잘 울리는 단편이 '이름을 새기는 죽음'이다. 아직 어린 교스케에게 호의에 기댄 어른의 숨겨진 악의와 차가운 진실을 알려줘야 하는 분노와 비애에 찬 마치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단연 두드러진 부분이다.




"차분히 생각해. 만약 다가미 씨 요구를 들어줬으면 어땠을 것 같아? 그랬는데 다가미 씨가 죽었다면? 히노하라 인쇄의 현역 사원이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죽은 셈이 돼. 누가 그런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겠어! 히노하라 교스케, 고개 들어!"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네 아버님은 널 걱정하고 계셨어. 다가미 씨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탁을 했다. 그 사람은 아무리 봐도 공포에 질려 착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아들은, 너는, 다가미 씨가 마지막으로 한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셨어. 그 녀석은 아직 어린애다, 선을 긋는 게 뭔지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렇게 말씀하셨어.

교스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소중한 거야. 그걸 지니고 있는 너는 정말 다정해. 하지만 다가미 씨의 부탁은 정상이 아니었어. 사람의 선의를 이용하려고 한 것과 다름없어. 그런 말에 언제까지고 사로잡혀서는 안 돼. 잊어. 잊는 수밖에 없어."

어느 새 교스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못 해요. 어떻게 잊어요."

다가미 료조의 마지막은 히노하라 교스케에게 이름을 새기는 죽음이 되었다. 다치아라이의 표정에 아주 잠깐, 절망적인 비애가 비쳤다. 그 표정이 사라지자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늘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 내가 결론을 내줄게. 똑똑히 들어, 그리고 기억해."

나직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영혼까지 닿을 것처럼 힘찼다. 그녀는 말했다.

"다가미 료조는 나쁜 사람이라 변변치 못하게 죽은거야."

- p. 234-5. 이름에 새기는 죽음




. 이렇게 이번 소설은 요네자와 호노부가 한 단계 성장했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교고쿠 나츠히코나 미나토 가나에처럼 데뷔 때부터 어느 정도 완성된 결과물을 보여주는 괴물 같은 작가들도 있지만, 이렇게 작품을 차례차례 읽어가면서 어느 순간 작가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것 역시 독자로서는 정말 즐거운 일이다. 다음 작품은, 그저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이름만 가지고도 주저없이 손을 뻗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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