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인의 만찬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이젠 모든 것을 알 수 있어 - 아주 간단하고, 어린애 장난처럼 단순하다네."
"다른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걸세. 그래서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관념, 즉 고정 관념에 입각해서 대답하게 되는 거지. 확신에 찬 증인은 항상 의심을 품고 다룰 필요가 있는 법일세, 알겠나? 불확실한 증인, 이를테면 잘 기억도 못하고, 자신도 없으며,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 아! 맞습니다, 그건 이러이러한 일이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증인이 오히려 믿을 만한 법이지!"
"놀랍군요, 포와로. 내가 증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 관념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군요."
- p. 150
. 80년이 지난 지금도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을 최고급의 호텔과 그 곳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만찬과 파티. 그 자리를 메우는 귀족들과 스타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중에서 뭐가 가장 훌륭한지, 어떤 트릭이 가장 뛰어난지에 대해선 이런저런 이견이 있겠지만, 가장 화려하고 극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이 13인의 만찬일 것이다.
. 배경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역시도 더없이 화려하고 극적으로 진행된다. 당대 최고의 미녀 배우인 '에지웨어 남작 부인' 제인 윌킨슨이 사보이 호텔의 화려한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포와로에게 "포와로씨,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몰아내야만 해요!" 라고 선언하는 초반부터가 압권. 곧 남편인 에지웨어 남작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당연히 혐의는 제인에게 집중된다. 남편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제인이 남편의 방에 올라갔다는 목격자가 나오면서 사건이 일단락되는 것 같았지만, 그 시간에 제인 윌킨슨은 '13인의 만찬' 자리에 참석한 상태였다는 게 확인된다. 뒤이어 한 여배우가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만찬이 끝나고 또 한 청년 공작이 살해되면서 사건은 완전히 미궁에 빠진다.
. 포와로도 감탄할 정도로 순발력과 대담함을 고루 갖추고 행운까지 따라주는 범인이었기에 이번만큼은 포와로도 마지막까지 고전하지만, 길 한복판에서 문득 들은 "엘리스에게 물었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한 마디에서 번뜩이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포와로가 이번만큼은 '기적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할 정도로 약간의 행운이 따라준 셈. 물론 행운을 놓치지 않고 깨달음으로부터 눈깜짝할 사이에 범인을 추리해내서 모두를 모아놓고 사건의 진상을 풀어내는 화려한 '포와로 피날레'를 연출해낸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마치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뻔한 스토리야. 그들이 곧바로 엘리스에게 물었으면 좋았을텐데.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거야 - ."
그 다음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보도에 닿았을 때 내가 뒤를 돌아다보니, 양 옆으로 버스가 달려오는 도로 한복판에 포와로가 멍청히 서 있었다. 그만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리고, 버스 운전사의 고함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포와로는 의젓한 태도로 보도를 걸어 나왔다.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보였다.
"포와로 - ! 아니, 당신 미쳤어요?"
내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아냐, 이보게. 그냥 어떤 - 어떤 생각이 문득 떠올랐을 뿐이었다네. 거기에서, 그 순간에."
"참으로 기막힌 순간이었군요. 게다가, 자칫하면 마지막이 될 뻔한 순간이기도 했고요."
"그런 건 문제가 안 되네. 아아! 여보게 - 난 장님이었고, 귀머거리였고, 게다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어. 이제는 그 모든 의문점들에 해답을 내릴 수가 있다네 - 그렇지, 다섯 가지 말이지. 암, 이젠 모든 것을 알 수 있어 - 아주 간단하고, 어린애 장난처럼 단순하다네."
- p. 277.
. 이 소설은 1930년대부터 시작되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에르큘 포와로의 최전성기의 막을 올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부터 애거서 크리스티는 '오리엔트 특급살인', '3막의 비극', 'ABC 살인사건', '나일강의 죽음' 등 추리소설사에 길이 남는 유명한 작품들을 쏟아냈고, 그 중 상당수는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영상화되기도 했다. 이 소설 역시 여러 번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1985년 작에는 무려 페이 더너웨이가 제인 윌킨슨을 맡았다니 한 번 찾아봐야겠다.
<1인 2역을 맡아 열연했다는 페이 더너웨이와 콧수염만 없다 뿐이지 누가 봐도 포와로인 데이비드 서쳇.
단 이 영화를 찍을 때는 서쳇이 아직 젊었기에 포와로가 아닌 제프 경감 역을 맡았다.
15년 후인 2000년에는 서쳇이 콧수염을 기르고 나와서 포와로 역을 맡았는데, 물론 포와로 그 자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