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의 비극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나는 대단히 무미건조한 사람입니다. 나는 오로지 사실만을 봅니다.
극적 효과나 여운 같은 것엔 전혀 신경을 안 쓰지요.
. 시작 부분에 잠깐 등장했던 포와로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멋지기는 하지만 추리능력은 전혀 없어 보이는 두 노신사가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으레 할 법할 질문만을 늘어놓는다. 탐정도 경찰도 아닌 아마추어 둘이 뭉쳤으니 추리라고 할 만한 부분이 있을 리 없고, 이야기는 그저 늘어지기만 하고 전혀 진행되지 않는다. 영 심심한 소설이라고 생각할 즈음 드디어 포와로가 등장한다. 그리고 읽는 사람의 지루함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후반부가 시작된다.
. 제목처럼 세 번의 살인이 일어나는 이 소설은 초반부터 포와로가 등장하는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리 '수수께끼의 할리 퀸'에 등장했던 멋진 노신사 새터드웨이트 씨의 시각에서 두 번의 살인사건과 그 중간 경과를 묘사하는데 책의 절반을 할애하고, 포와로는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천천히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새터드웨이트 씨와 찰스 경이 탐정 역을 맡은 전반부의 전개는 그저 지지부진하고, 범인이나 수법은 물론 사건의 동기조차 감이 잡히지 않은 채로 200페이지가 흘러가버린다. 부와 명성에 귀족작위까지 갖춘 의사와에 대한 두 번째 살인과,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그저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평범한 시골목사가 죽은 첫 번째 살인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 추리는 커녕 힌트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 그런 모호한 와중에 포와로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전개된다. 어영부영하게 진행되던 수사는 사건의 핵심을 찔러들어간다. 그전까지 감도 잡지 못했던 범행 방법의 포와로의 시연 한 번에 밝혀진다. 마치 마실이라도 나온 양 화기애애했던 용의자들은 묘한 분위기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다. 이쯤되면 이렇게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으면서 대체 왜 이야기 절반을 그냥 버렸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이에 대해서도 애거서 크리스티는 또다시 제대로 뒤통수를 후려치는(정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신음이 나왔다) 멋진 답을 준비해놓고 있다. 책의 내용 뿐만 아니라 구성까지도 이용해버리는, 3막의 비극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극적인 답과 가차없는 결말을.
. 이 소설은 '13인의 만찬'에서부터 시작된 애거서 크리스티 전성기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작품으로, 포와로를 앞세운 이 시기의 소설들은 대부분 화려하고 멋진 상류사회의 모습을 다룬다. 이 소설 역시도 수수께끼의 할리 퀸에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영국 신사의 모습을 보여 준 멋진 노신사 새터드웨이트 씨와, 역시 매력이 넘치는 대배우인 찰스 카트라이트 경이 출연해 소설의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여기에 비록 외모로는 많이 떨어질지 몰라도 카리스마와 존재감으로는 전혀 뒤쳐지지 않는 포와로(사실 분위기 잡고 있으면 포와로도 꽤 멋있다. 워낙 헤이스팅즈랑 만담을 해대서 그렇지. ^^;)까지 세 노신사가 이루는 합을 보고 있노라면 한때 대유행했던 영국신사 찬양 만화를 보는 수준이라, 크리스티 여사님도 쓰는 내내 사심을 채우시면서 꽤 즐기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추리의 완성을 위해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장면(....)을 놓고도 칼 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게 크리스티 여사의 장점이고, 동인녀로 유명하신 다른 여사님과의 차이점이긴 하지만. :)
"당신 생각도 에그와 같군요. 그가 죽었다고 봅니까?"
"다시는 살아 있는 앨리스를 보지 못할 겁니다."
"악몽이로군!" 하고 찰스 경이 벌컥 소리쳤다. "모든 게 도대체 이해가 안돼요!"
"아니, 아닙니다. 정반대죠. 지극히 논리적이거든요."
찰스경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요?"
"그렇고말고요. 아시다시피, 나는 상식적인 사람인걸요."
"당신 말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새터드웨이트 역시 그 작달막한 탐정을 호기심어린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럼?" 하고 찰스 경이 약간 불쾌한 듯이 말했다.
"당신은 배우에 딱 알맞는 사람입니다, 찰스 경. 창조적이고 독창적이며, 항상 극적인 걸 찾고 있습니다. 새터드웨이트 씨는 관조적인 사람이고요. 그는 사람들을 지켜보지요. 그리고 분위기를 민감하게 포착합니다. 하지만 나는 대단히 무미건조한 사람입니다. 나는 오로지 사실만을 봅니다. 극적 효과나 여운 같은 것엔 전혀 신경을 안 쓰지요."
- p. 264-5. 세 노신사 간에 불꽃이 튀던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