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로 옮겨간 교고쿠도 시리즈

항설백물어 - 교고쿠 나츠히코 (비채)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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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의 꿈이라는 걸 알면서 반하고, 알면서 매달리지.
그게 멋이라는 거 아닌가.




. 예전에 인터넷에 올라왔던 '만화가들의 망언모음'이라는 게시물에 괴기만화가의 일인자인 이토 준지가 "세상에 귀신 따위가 어디있냐"고 한 말이 실린 적이 있었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물을 봐도, 교고쿠 나츠히코의 책을 읽어봐도 의외로 일본에서 '영적존재'라는 건 일반적으로 이런 정도의 취급인 듯 하다.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도 잘 팔리고 돈이 되니까 영화든 만화든 소설이든 꾸준히 나오지만, 보통은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가 그런 걸 믿겠냐 정도의 인식. 뭐 애초에 8백만이나 되는 신들이 여기저기 엉켜있어서야 딱히 신이라고 존중해 줄 생각도 들지 않을테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보편종교가 있는 나라도 아닌데다 그마저도 2차대전을 거치면서 제대로 한 번 뒤엎어졌으니까.


. '항설백물어' 역시 이런 전형적인 일본인들의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교고쿠도 시리즈나 백기도연대처럼 요괴가 얽혀 있는 기담을 토대로 하고는 있지만, 이런 전설을 만든 것도, 그 전설을 이용하는 것도, 그리고 그 전설에 얽힌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모두 인간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물과 비슷하지만 좀 더 냉소적인 어투로, 귀신이나 요괴 따위는 사람의 어두운 마음을 형상화한 존재일 뿐이며 진정 무섭고 비참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마치 에도시대로 무대를 옮긴 교고쿠도 시리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 인형을 만드는 미인과 수수께끼(진짜 아이들 말놀이하는 그 수수께끼 맞다)를 만든다는 젊은 사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추레해보이는 노인과 승려차림을 하고 '어행봉위!'를 외치는 4인조가 범인을 자백시키기 위한 연극을 꾸미고, 연극마다 각각의 '요괴'들이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그래서 단편들에도 '하쿠조스', '마이쿠비', '야나기온나', '시바에몬 너구리'처럼 요괴의 이름을 딴 제목이 붙여져 있는데, 우리에겐 마냥 낯설게 느껴지는 요괴들이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 거기에 단편마다 맨 앞장에는 요괴의 그림과 요괴에 얽힌 짤막한 문구까지 실려 있으니 딱히 읽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악당들끼리 물고 물리는 소동극을 다룬 '마이쿠비', 너구리가 인간으로 둔갑한다는 기담을 이용해 유쾌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시바에몬 너구리', 인물의 변화 뒤에 숨겨진 진상을 추적해가는 '시오노 초지' 같은 단편들을 추천. :)


. 교고쿠도 시리즈의 팬이라면 다들 느끼겠지만, 항설백물어 시리즈는 교고쿠도 시리즈와 많이 닮아있다. 기담 속에 가려진 진실을 밝혀내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연극을 펼치는 어행사 마타이치는 마치 에도시대에 나타난 교고쿠도를 보는 느낌이고, 백 가지 기담을 쓰겠다는 꿈을 가지고 마타이치를 돕고 사건의 진상을 듣는 모모스케에게선 '상태가 괜찮았던 시절의(^^;)' 세키구치가 떠오른다. 특히나 '가타비라가쓰지' 편에서 사랑을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범인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면서 씁쓸해하던 마타이치에게선 망량의 상자에서 '행복해지기 위해선, 사람을 그만둬 버리면 되네'라고 이야기하던 교고쿠도의 모습이 겹쳐지는데.... 쓸데없는 망상이지만, 이쯤되면 '이 세상에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모스케 선생.'이라는 마타이치의 말로 끝나도 괜찮지 않았을까. :)




"시간이 흐르면 아름다움도 추하게 바뀐다. 미추는 같은 것이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따위는 없다. 색은 변하는 것이니 그처럼 허무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그림이지."

"흥."

마타이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거야 나도 백 번도 더 잘 알고 있어. 이봐, 불제자. 너, 중이 되려다 만 지 몇 년이나 지났나? 비린 것 먹으며 살고 있는 것치고는 아주 중 냄새 솔솔 풍기는 소리를 하는구먼. 색은 변하고 향기는 옅어지는 법.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그런 건 당연하지. 모르는 녀석이 바보일 뿐. 이렇게 불쾌한 건 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라고. 한순간의 꿈이란 걸 알면서 반하고, 알면서 매달리지. 그게 멋이라는 것 아닌가. 너한테 에도의 불꽃놀이를 보여주고 싶구만."

- p. 494. 가타비라가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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