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안개의 서재_13
길을 통하여 세상으로 나왔고
길을 통하여 사람들과 만났다
빛과 그림자를 보았고
눈물과 한숨을 익혔다
길을 통하여 빛보다 그늘이
더 빛난다는 것을 배웠고
사람들보다 더 많은 별들이
사람들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나는 길을 통하지 않고는
꽃도 보지 못하고
열매도 따지 못하게 되었지만
나는 내가 길에 갇혀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날 나는 길 밖으로 나왔다
더 많은 세상으로 나왔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더 많은 빛과 그림자를 보았고
더 많은 눈물과 한숨을 겪었다 그리고
별들보다도 더 많은 나무와 풀이
사람들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 알면서
세상도 사람들도 길이 되었다
별들도 나무와 풀도 길이 되었다
그런 다음
세상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들 속에 사는 별들을 통해서
나는 다시 길로
들어갔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신경림 지음) 중에서
2003년 프랑스 기자출신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은퇴 후 중앙아시아를 걸어서 횡단하고,《나는 걷는다》라는 3권짜리 두툼한 책을 낸 것을 읽고, 나도 은퇴하면 '걸어야겠다.'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이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습니다. 7월에 우간다 선교여행 후 제주 올레길을 1코스부터 다시 걷기로 합니다.
신경림의 詩에서 자주 나오는 것이 바로 '길' 입니다. 길은 사람과 교감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세상과 통하는 교량(橋梁)이기도 합니다. 물론 길 밖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세상이 우리와 맞닥트려지기도 합니다. 세상과 대하면 대할수록 눈물과 한숨의 그림자는 더 짙어져 갑니다.
신경림 詩의 묘미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길을 통해서 시인은 그늘이 빛보다 더 빛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사람들 속에 별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더 많은 세상과 사람을 만날수록 더 많은 나무와 풀이 이들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해 지고 날이 어두워지니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고, 잡초만 어지럽던 곳에 풀벌레가 숨죽여 있던 것이 보입니다.(신경림의 詩 《허공》중)
나도 생각해 보면 많은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스페인 산티아고순례길, 사하라사막, 모로코 미로도시 페스, 탕헤르, 튀르키에 보스보투스해협에서 대륙의 건너편을 바라보며, 메디나의 시장 상인들 속에서 이국 땅의 여행자이거나 낯선 도보자이기도 했습니다. 길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해도 그들에게는 밝은 웃음과 따뜻한 눈빛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신경림 시인이 말씀하신 별, 나무, 풀인 것 같네요. 또다시 제주의 낯선 길을 걷고자 합니다. 어떤 이들을 만나게 될는지요. 또 어떤 별들이 사람들 속에 숨어 있을까요. 제가 걷는 이 길위에 축복이 있기를 '부엔 까미노'
(이 글은 2025.7.3일 블로그에 쓴 글로, 이후 저는 2025.8.1 - 10.15까지 제주올레길 27개코스 437km를 완주했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모든 별들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분들 삶에 축복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