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일하는 사람들
”아니! 술 좀 더 달라고! 감질맛 나잖아. “
”네. “
”아니! 이 작은 잔에 뭘 담아 준다고, 맥주는 한 번에 들이켜야 하는 거잖아! 캔 줘봐! “
”손님, 이러시면 안 돼요. “
”아니, 이거 애초 시음 맥주 아냐?! 그럼 내가 이거 한팩 살께! 그냥 하나 주면 되잖아. “
희영 언니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맥주캔을 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힐끗거리면서 봤다. 나도 맥주시음행사를 하고 있었던 터라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누가 맥주를 집어가서 마실지 모를 일이었다.
”에그- 저게 무슨 일이래. 교양 없이. 한잔 줘봐요. “
내 앞에선 중년의 아주머니는 소란스러운 희영언니를 보면서 혀를 찼다. 누구에게 하는 혀 차는 소리일까? 나는 조용히 맥주를 작은 잔에 담았다.
”감질맛 나기는 하네, 저런 사람들 조심하려면 잔을 좀 더 키워야겠다. “
맥주를 맛보던 아주머니는 나를 보면서 모자라다듯 빈 잔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렇죠.라는 말과 함께 술을 조금 더 따랐다. 시끄러운 희영언니 쪽에는 보안팀이 왔고, 그 손님은 한참 소리를 지르다 시음하는 가판대를 발로 차면서 사라졌다. 소란스런 손님이 가자, 주변에 있던 시음을 원하던 손님들이 언니를 감쌌다. 언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면서 시음을 진행했다.
”언니 괜찮아요? “
”괜찮아. “
”무서웠겠다. “
”무섭다기보다 다행이었어. 보안팀이 와줘서. 전에는 안 왔거든. “
”미안해요. 뻔히 보이는데 못 갔어. “
”아냐, 너 왔으면 일이 더 커졌을 거야. 너 맥주도 뺏으려 들었을걸? “
”집에서 마시지. “
”살 생각이 없는 거지 뭐. “
”... “
언니의 등을 쓸었다. 마른 언니의 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르고 작은 사람이었다. 안아주고 싶어도, 부서질까 무서워서 포근히 안아주기가 힘들었다. 언니는 덤덤했다.
퇴근하는 길에, 언니는 내 맥주를 사갔다. 자신이 하고 있는 맥주는 자기 취향이 아니더라 했다. 내가 행사하는 맥주는 간호사 시절, 유독 힘든 날에는 편의점에서 자주 사 먹었던 맥주라고 했다. 시원하게 내려가는 청량감을 가진 맥주보다는 고소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맥주가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6개짜리 캔맥주를 양손에 안아 들었다. 명품백은 팔목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얇은 발목 아래의 높다란 하이힐은 아슬하게 흔들리며 조금씩 마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 언니의 뒷모습은 참 쓸쓸해 보였다. 오늘 유독 힘들어서였을까, 그런 언니를 보면서 가여워서였을까, 아니면 원하는 목표에 갔다가, 현실과 타협하면서 사는 삶의 모습을 한 어른을 부정하고 싶어서였을까.
”나 행사 종료“
”아직 며칠 남았잖아요. “
”컴플레인 들어왔대. 그래서 조기종료. “
”그럴 수도 있어요? “
”다행히 바로 파견 나갈 마트 있어서 그리로 가. “
”아쉽다. “
"그러게. 알바 잘하고, 학교 가서 공부 잘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
”그 멘트 별로야. “
”뻔한데, 뻔한 말이 옳은 말이고, 맞는 말이야. 새겨들어. “
”언니도 공부 잘했고.. 잘했잖아. “
”아, 못했지. 못 버텼지. 그럼 추가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좋은 곳에서 버텨라. 무조건. “
"버텨야 하는 거야?"
"즐기면서 버티면 더 좋고."
"언니는? 다시 병원은 안 가고?"
"거기는 별로야. 업종 자체가."
”언니가 있었던 곳도 좋은 곳이었다고 생각해. “
”사람 느끼기 다른 거지. 남들 보기엔 좋은 곳인데, 나에겐 좋은 곳이 아니었잖아. 지금 여기가 나에겐 좋은 곳이야. “
”맞아? “
”맞아. “
”계속 이 일 하려고? “
”한동안은- 다른 좋은 곳을 모르겠어. “
”연락할 거야? “
”아니. 하지 말자. 그냥 스쳐가는 거야. 서로 힘이 되어줬고, 여기서 그렇게 잘 지냈고, 그게 끝인 인연인 거야. “
”이렇게 끝? “
”네가 싫어서 연락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이렇게 좋은 기억으로 스치자는 거지. 너도 그냥 예전엔 그랬었지- 하는 사람으로 날 기억만 해줘. 아니다. 기억 안 해도 돼. “
언니는 웃으면서 갔다. 같이 쉬고, 가까운 곳에서 같이 일을 했고, 말을 여러 번 나눴는데, 전화번호는 주고받지 않았다. 마트를 돌고 돌다 보면 만날 일이 있을 것이고, 만나지 않는 건 만나지 않는 대로 잘 살고 있다는 뜻일 것니까. 굳이 긴밀하게 친밀하게 계속 연락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렇게 언니는 그냥 나와 인사를 했고, 그 뒤로는 보지 못했다.
”엄마. “
”응. “
”간호사 언니- 행사 끝나서, 다른 마트 갔어. “
”며칠 더 있어야 했던 거 아냐? “
”어제 진상손님이 컴플레인 걸었나 봐. “
”잘못은 그 사람이 했는데? “
”그러니까. “
”어쩔 수 없지. “
”너무 해. “
”그게 사회야. “
”언니, 그래도 좋은 대학에 대학병원 간호사였는데. 마트에서 일할 수도 있지.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도 돼? “
"간호사들도 어려움 많아. 알게 모르게 무시도 많이 당하더구먼. 뭐 텔레비전에도 나오잖아. 일도 힘들고, 환자 상대도 힘들고. 원래 아픈 사람 상대하는 게 힘들어."
"그래도 엄마는 간호사가 낫다며."
"마트보다야."
"병원과 마트 차이가 큰가."
”크지. 너도 알잖아. 아무나 될 수 있는 곳과 아무나 될 수 없는 곳에 따라서.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거. 귀천이 없다고들 하는데, 귀천은 있어. “
”귀천의 기준이 뭐야? “
”낸들 아니- 돈만 많이 별면되지-했는데, 돈 많이 벌어도 무시해, 좀 좋은 자리에 있다고 해도, 돈을 못 벌면 무시해. 그러니까 좋은 자리에 돈도 많이 벌고, 권력도 있고. 그런 거 해야지. “
”그런 자리가 있기는 해? “
”잘 봐, 있긴 해. “
”소수잖아. “
”그래서 소수들 보면서 다수끼리 무시하는 거지. “
”싫다. “
”학교 다닐 때는 보이는 성적이나 외모가 다였지. 사회는 더 복잡해. “
”학교에서도 그런 거 은근히 있긴 했어. 하지만, 그건 아이들이니까 유치하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 어른들도 그럴 줄은 몰랐어. “
”사회는 대놓고야. 드라마 좋아하는 애가 새삼스레. “
”언니 퇴근할 때 항상 명품가방에 좋은 옷 입고 다녔는데. “
”마트에서는 유니폼 입잖아. 명품가방이나 좋은 옷 보이지도 않아. “
”웬만한 회사원들보다 돈 더 많이 버는데. “
”일반적인 사람은 몰라. “
”어렵다. “
”뭐가. “
”성공이. “
”어렵지. 그래서 아무나 못하는 직업, 아무나 못하는데 월급 많이 받는 거. 그런 거 하려고, 다들 노력하는 거야. 무시 안 당하려고 하는 거야. “
”나 그럼 시험 볼래. “
”그건 돈 많은 사람들. 여유로운 사람들 거야. 우리한테는 돈도, 시간도 여유롭지 못하니까, 잔말 말고 졸업 예정대로 하고 취업 궁리 좀 해. “
마트에서 일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반짝이고 커다란 마트에서 내게 할당된 물건을 팔면서 재미있었다. 직장이라는 생각보다는 아르바이 트니까, 평생 할 일은 아니니까,라고 생각하면서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같이 일하는 주변의 이모님들과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갓 어린아이가 듣는 어른들의 무거운 무게가 남달랐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어른들은 고난과 역경 속의 반전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고난과 역경의 나날이었다. 지친 이들의 등을 쓸어주고, 응원해 주는 타인은 흔치 않았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잔혹한 이야기만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어른들의 행복은 달랐다. 복잡했다. 선택하고, 생각하고, 내몰리고, 포기하고, 다시 선택하고 생각한다. 그런 나날을 반복하면서 살고 있었다.
나는 어른들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그저 함께 하며 흉내 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번 돈은 내 등록금이 되어주고, 학기 중의 용돈이 되어줬다. 그러는 동안 나는 또래보다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고, 학교의 테두리에서 살짝 벗어난 사회인의 맛보기에 심취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의 아르바이트가 끝이 나면 나는 마냥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10년이고 20년이고 그 위치에서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오만이었고 자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이 좋아 좋은 직장을 취업을 하게 될지라도, 그 속에서 치열하게 버텨야 하고, 나아가야 할 길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나와 함께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어른의 길을 보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다양한 길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