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절 예불을 드리고 오면서 108배로 인한 근육통이 뒤따랐다. 엄살을 보태자면 계단 내려가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절룩절룩 걸음이 무거웠다. 간만의 예불과 108배 후, 내 마음은 한결 편해졌을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친정엄마까지 합세한 독일 팀이 한국을 떠났다. 원래 나처럼 마음속에 늘 여행 폴더 지니고 사는 친정 엄마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 '심드렁' 단어를 내려놓았다. 시차적응도 필요 없이 어느새 엄마는 '즐거운 독일 할머니'가 되었다.엄마가 찍는 수십 장의 사진들 곳곳에서 설렘과 활력이 묻어났다. 내, 그럴 줄 알았지. 1년 넘게 재활병원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잤을 엄마가, 사정이 어찌 됐건 독일에 가게 되어 그녀의 등에 작은 날개 하나 달게 되었다니. 반가울 일이었다.
떠나는 마음은 무거웠을지언정 엄마의 합세로, 동생의 사진 속에서도 전보다는 나은 여유가 묻어났다. 뒤에서 엄마가 찍고 앞에서 자연스럽게 거니는 척을 했을... 어느 숲 속 산책길에서의 사진을 보아하니, 그랬다.
나는 매일 업데이트되는 그들의 독일 일상을 부러워했다. 내 눈에 독일에서의 모든 생활엔 '낭만'이라는 단어가 반짝거렸다. 마음이 몽글몽글하던 차에, "일상이 독일, 그리고 유럽"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내 가족의 일이어도 우울감이 몰려들었다.
친구 일이었다면 배가 아팠을 텐데 가족의 일이라, 배까지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근 10년째 쳇바퀴 돌듯 제자리 동선, 꽉 막힌 내 일상이 서글펐다. 결혼 전과 다르게... 여권에 찍힌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스탬프, 발이 묶인 지금이 애달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의, 독일을 즐겨.
그래도, 독일로 예기치 않게 떠나게 된 동생에게 작년부터 늘 이렇게 말해왔다.
(지금의 독일, 주말마다 거니는 유럽의 도시들에, 슬플 겨를이 있을까.)
내가 잠깐 겪었던 예전의 독일은, 그리고 공유되는 독일 팀 사진 너머로 보는 지금의 독일은. 비에 젖은 숲마저도 운치 있어 보였고 흙냄새마저 달큼할 것 같았다. 비 오면 큰 창 너머로 보는 마당 한 켠, 깻잎에 송골송골 맺히는 빗방울에 뿌듯할 것 같았다. 초보 식집사 손에서도 기특하게 자란 깻잎을 칭찬해 주어야지. 한숨쉴 시간이 어디 있나.
3층 단독주택 창문 너머로 비 온 뒤 짙게 내려앉은 안개를 보는 일. 영어나 독일어가 서툴러도, 동네 골목길마다 숨겨진 작은 가게를 걷고 탐닉하는 재미가 가득한 동선.매일매일 신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내가 걷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배롱나무도, 무궁화, 코스모스도 좋았지만 독일에선 꽃나무들에마저도 망원 렌즈가 끼워져 이국적으로, 한층 멋들어진 느낌.내 걸음 위에서 들리는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보다 수화기 너머 독일 새소리는 더 청아하게 들렸다.
물론, 독일 생활은 겉핥기로만 들어도,녹록지 않았다. 세 아이와 함께하는 국제학교 생활뿐만 아니라 생활비 등 경제적 여건, 낯선 외국어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한인 사회 속 서툰 인간관계 속에서의 고민, 날로 악화되는 자궁 건강 등 실로 그 영역이 방대했다.여태 여행 아닌 해외 생활을 해본 적 없는 I형 동생의 체감 온도론, 개똥밭 즈음 됐으려나.
사랑과 희생의 마음으로, 조카들을 비롯한 세 아이들과 함께 예정에 없던 출국을 하게 돼서 더 그랬을 테다. 한국에서의 일상과 커리어, 가족까지 포기하고 떠난 동생의 1년.
하지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공백을 메꾸긴 해야 했지만 나로선 등 떠민 적도, 강요한 적도 없이, 오히려 우려하며 말렸던 선택이었기에 그랬고. 그저 그녀가 내린 결정이, 계획에 없었다한들 현명한 결정으로 매듭지어지길 바랄 뿐이었으니. 고심 끝 결정 내린 독일 살이가 단지 잃어버린 2년이 아니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독일 스테이만 같아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2년이길 바랐다. 적어도 그곳에서 살 궁리를 해보길, 본인의 선택이 온전히 '자의'는 아니었을지라도 그 선택을 온통 희생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후회하지 않기를.국제학교라는 새로운 경험이 멋진 기회이길.
그래서 늘 동생의 고충 토로에, 난 비슷한 맥락의 조언들만 쏟아냈다.
(숲 속을 걸어봐, 새소리를 들어봐.)
적어도 현실의 무게가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지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그렇지만 나의 이런저런 조언들엔, 매번
("내가 원해서 간 독일이 아니어서...")라는 방어와
("독일을 즐기라는 건, 언니 입장에서고...")라는 시니컬함이 시린 대답,
(지금 밖에 비 오는데, 뭘 자꾸 산책을 하래...) 푸념인지, 질책인 지 애매한 답이 들려왔다.
거의 1년 내내 나와 동생은 그렇게 평행선을 걷고 있었다. 한국 생활이 답답하고 버거웠던 나는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었고, 외국 생활에 크게 로망이 없던 동생은 '자기 연민'이라는 단어 속에만 얼룩져있었다.동생의응어리진 마음은 24/7 잠시라도 부럽지 않은 순간 없었던 독일살이 와중에도 말랑말랑 풀어지지 않았다.경직된 몸과 마음은 독일의 멋진 전경 앞에서도 좀처럼 이완되지 않았다. 그러다 탈이 났다. 급기야 응급실에 실려가 입원할 지경에 이르렀다.
굳이 없는 재료로, 한국에서도 담가본 적 없는 겉절이와 씨름하는 그녀가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1년 동안 김치 좀 안 먹으면 어때.)
어렵게 담는 겉절이 대신,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달리 할 수 있을 그녀만의 동네 맛집 지도를 채워나가길 바랐지.
예불을 마치고 절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선 속에 있던 나만의 맛집 사이에서 고민하던 것처럼 말이다. 간 마늘, 간 고추 흠씬 몰아넣고 즐기는 짱뚱어탕에, 열무잎에 된장 찍어 즐기는 맛집과 흑설탕 듬뿍, 감질맛 나는 생김치가 나오는 팥죽집 사이에서 오래 고민했던 나처럼.
(커피를 마시러 나가봐)말하면
(애들 데리고 어딜 나가.)들려오는 대답.
이 집 커피는 더 산미 있고 저 집 커피는 더 고소하네.어느 커피집이 입맛에 맞을는지 이 집 저 집 다녀봐야 알 일 아닌가. 아이들 학교 보내고 오는 길에, 한 군데씩 커피집이나 치즈 가게에만 들르면 되는 게 그렇게도 어렵나.
로켓배송의 마법이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는 내겐, 물건을 꼭 마트가서야 만 살 수 있는 독일이 불편하지 않아 보였다.
물 아낀답시고, 설거지를 모아서 해야 한다는 독일이 답답하지 않아 보였다. 설거지 통에 그릇이 잠시 쌓이면 어때.
다이소 폼 블록이 있어야 청소에 효율이 붙는 정리의 여신이 아닌 나인지라, 다이소가 동선에 없는 동네여도 괜찮았다.
없는 재료로도 제법 그럴듯한 요리를 구현해 낼 수 있는 나에겐 독일의 식료품 가게도 그럭저럭 지낼만할 것처럼 보였다.
사진으론 부러움만 남기던 독일 일상 못지않게, 한탄과 후회가 눈에 밟히는 때가 많아서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사진으론 주관적으로 해석되는 낭만이 날 괴롭혔고 사연 서린 현실 고충은 말로만 들어도 숨이 막혔다.
그래도 사정이 그럴지언정 내 입에선 끊임없이 "개똥밭에 굴러도 독일이 낫다."는 말이 나왔다. 개똥밭을 구르는 심정의 동생은 매번 기가 막혔을 테다.
(여기에서의 나는 행복하지가 않아.
내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닌데)
그 넋두리들이 돌고 돌아 그녀와 나의 꼬리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안타까웠다. 그리고 나에게 없는 것들만 찾아내어 부러움에 속 끓이는 나도. 부정적인 말들만 뱉어내는 우리도.
자기 꼬리를 물어 원형을 만드는 뱀이라는 우보로보스(Ouroboros)라는 뱀처럼, 자기 연민과 한탄으로 스스로 꼬리를 물고 딜레마에 갇힌 뱀이 되었다가, 우리 가족에게로 갑자기 들이닥친 비극에 공격당한, 영문 없이 돌 맞은 개구리가 되었다가... 지금 이 순간 아름다운 우리를 잃어가는 건 아닐까.
그 와중에, 새로운 병원으로 옮겨 상담을 하던 중
"우울하진 않으셨어요?"라는 재활의학과 담당 의사 선생님의 말에, "별로요."라고 서슴없이 대답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딸 중에 가장 단단한 사람. 곧 독일에 갈 거라던, 그녀의 두 다리에 점점 균일한 힘이 실리고 있었다. 보던 중, 듣던 중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