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요리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요리를 배우라는 강요도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풍족하진 않았어도 늘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자라게 해 주었던 어린 시절과 요리를 잘했던 엄마가 주는 선물을 받은 것처럼. 요리하고, 맛있게 먹고, 새로운 음식을 탐닉하고 구상하는 시간은 매번 즐거웠다.
물론 집 떠나 타지 생활을 하게 되면서 먹고 살려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대충 때우는 끼니와 한 끼라도 제대로 챙겨 먹는 집밥의 무게는 늘 현저히 달랐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난 늘 서슴없이 주방 안에서 배회했다. 그게 고시원 주방이든, 아르바이트를 하던 식당의 주방이든.'먹고 살려고' 대충 먹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려고' 없는 박봉의 타지 살림에도 늘 살뜰히도 챙겼다.
캐나다에선 한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두고 있지만 통조림 파스타를 따, TV앞에서 저녁을 먹곤 하던 어린 사촌들이 날 요리하게 했다.
간간히 한식당 일을 도우면서, 디저트들을 모양내어 깎아내며 과일들에 제법 기교를 부릴 줄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월세 살이 할 때도 없는 자취방 살림으로 복작복작. 퇴근 후엔 한식 조리사 과정과 브런치 반 클래스를 수강했고 주말엔 이탈리아 요리를 가르쳐준다는 주민센터 요리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살면서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할 땐 홀 서빙으로 들어갔다가 주방 보조로 나왔다. 친해진 셰프님에게 "요리 학원도 다녔으니 주방 보조로 써달라." 호기롭게 요구했던 탓이다.
두바이 호텔 근무 시절, 호텔 자체는 5성급이었을지 몰라도 직원 식당은 필리핀과 인도 로컬 식당 수준이었던 터라... 한국에 잠깐 휴가 나오던 비행기 수화물엔 급기야 압력밥솥을 싣게 되었다. 비싼 한인 마트 갈 형편은 안되어 최소한의 재료로, 로컬에서의 식재료를 구해다가 제법 그럴듯하게 한국 음식을 요리해 내었다.
난임으로 전국의 병원을 찍고 돌던 때엔, 인근 맛집에서 도장도 같이 찍고 왔다. 축 늘어져 발걸음이 무거운 채로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밥만이라도 씩씩하고 야무지게 먹자 싶어서!
그리고 병원에 안 가는 동안엔 남도향토음식 요리 과정을 수강하면서 낙지를 둘둘 말아 낙지 호롱을 만들고 맛있는 식감의 떡갈비를 구워내는 법을 배웠다.
결혼 후엔, 술을 좋아하는 남편에게 술 따라 기분 따라 안주 내는 재미에 푹. 영양교사였던 친정 엄마 못지않게, 아니 더... 제철 음식 요리에 진심이신 시어머니의 비법을 눈여겨보는 시간에 폭 빠졌다. 결혼 후 양가에서 맛있는 음식들을 얻어먹을 수 있는 복도 흔한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더 감사히 즐기게 되었다.
아이를 낳은 후엔, 아이들에게 냉장고에서 꺼내... 내 기준에 생생한 맛을 잃은 음식 대신 따뜻하게 갓 요리한 음식을 주고 싶어서 늘 욕심이었다.
블로그를 하면서 오마카세 협찬도 종종 들어오는 때가 늘면서, 남편과 무료 데이트를 하는 호사도 누렸다. 그리고 늘 재밌는 식감과 멋들어진 플레이팅을 찾아내었다.
이만하면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시간 요리에만 매진할 수 없어 주방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려 한다. 이 식재료 조합이면 이거 말고 다른 음식 하나 더 만들겠는걸! 생각을 접기.
아이들이 없는 다만 몇 시간의 시간 동안 운동으로도 나를 채워야 하고 배움도 놓치지 않아야 하니. 쉬는 시간에마저 온통 집안일과 요리로만 꾸역꾸역 채워 넣는 엄마일 수는 없어서. 간간히 요양 병원에도 들러야 하고 재활 병원에도 들러야 하는 나는, 나도 가끔은 내려놓아야 하니까.
그리고 조리 과정을 줄이고 식재료의 묘미를 한껏 살려 심심하게 먹으려 한다. 육류나 가금류 등 포화지방산 함량이 높은 식품은 피하고, 견과류나 올리브유 등 불포화지방산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기. 저염식이나 무염식 등 나트륨을 조절해서 최소한으로 요리하고칼륨의 함량이 많은 과일이나 채소 등을 섭취하기.
주방에서 요리로, 설거지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아이들과 마주 앉아 책장 앞에서 보내는 시간으로 채우고. 엄마, 아내, 딸, 언니라는 이름은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나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주고. 신나는 음악 앞에 둠칫둠칫 다이어트 댄스를 추며 운동하는 활력을 불어넣고.
늘 엄마일 순 없고 아내일 순 없어서 난 요새 제법 거절이라는 걸 하려 한다. (잘하진 않아, 못해서...'거절한다'로 쓰지 못했다)
지금도 잘하고 있는, 최선을 다하는 나에게
내가 꾸려가는 시간에 대해 누구라도, 행여 강요하거나 주입시킬 순 없다. 나의 시절은, 나의 상황은, 그래서 나의 지금은 누군가의 그것과는 달라서.
나는 내 시간 앞에, 내 의무 앞에, 내 살림 앞에 당당해서 그렇다. 최선을 다할지라도 모자란 건 어쩔 수 없다. 이미 최선을 다했기에 부족하거나, 그래서 아쉬운 건 내 몫이 아니라서.
아이들은 거창하진 않아도 매 끼니때마다 건강하게, 따뜻하게 내는 요리를 기대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사주는 패스트푸드 쿠폰을 기다린다. 주방에서 요리하는 내 옆에서 요리하려는 열정을 내비친다. 아이는 스스로 요리하려 하고 간혹 요리해 낸 음식은 편식 없이 더 열심히 먹는다. 그 정도면 됐다.
그리고 앞으로 쌍둥이들이,
제철 재료로 요리해 내는 음식들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하루의 이벤트로 삼고.
맛있고 재밌는 식감을 찾아내고 플레이팅 아이디어를 구상해 내고.
한 끼 끼니가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닌 하루 한 자락, 마음의 온기까지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비밀을 간직하고.
좋아하는 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시간을 할애할 줄 알고.
때론 먹는 것만을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날 줄 알고.
어딜 가든, 맛집을 찾고 어떤 음식이라도 더 맛있게, 멋들어지게, 낭만적으로 즐길 수 있을 포인트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