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 여름방학을 보낼 겸, 자궁선근종으로 자궁적출수술을 받을 겸, 독일에서 지내던 가족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8월 중순, 친정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이 독일로 떠난다. 한국에 갓 들어온 아이들에게, 그리고 독일로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디를 제일 가고 싶어?"
"목욕탕"
그러면서 고사리 손으로, 색종이를 찢어 열탕, 냉탕 목욕탕을 만들어놨다.
짜릿한 놀이공원도, 시원한 물놀이 장도 아니었다. 숨 막힐 듯 푹푹 찌는 더운 여름날 입 모아서 말한 곳이 목욕탕이라니.
독일에 가기 전에도 난 목욕탕 행 쿠폰을 여러 번 발급한 적이 있던 사우나 좋아하는 유일한 이모였다. 목욕탕 맛을 본 그들은 늘 나를 보면 넌지시 '목욕탕 가는 날'이 언제인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나는 자주 갖가지 단서들을 붙여 쿠폰을 팔았다.어차피 데리고 갈 목욕탕이었으면서도.
여탕에 들어가기 전, 마트에 들러 각각 목욕탕 안에서 마실 음료수들을 고르는 1,000원짜리 신남 쿠폰을 발행한다. 목욕 바구니에 담아 갈 작은 사탕과 젤리들을 올망졸망 고를 수 있는, 사우나용 주전부리 쿠폰을 끼워 판다.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성인과 똑같은 9,000원 대인 요금 내는 게 아까워 꼬불쳐두었던 이모의 사우나 회원권 7,000원 상당의 쿠폰을 내민다. 결국모두가 함께 누릴 우유 마사지 호사를 위한 흰 우유 1,200원까지 해서 1인당 만 원 안 짝으로 끝나는 목욕탕 행.
온탕과 이벤트탕만 오갈 뿐인, 별 것 없는 목욕탕 나들이지만 여탕에 함께 가는 발걸음들에 설렌다. 여아 넷이서 들고 가는 목욕 바구니를 부러워하는 8세 아들 머리 위에만 먹구름이 끼는 대망의 목욕탕의 날.
들어가자마자 다섯 개의 의자로, 다섯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선점하고 2-3개의 거울 앞에 옹기종기 앉고 나면!아이들 작은 손에 바디 제품과 샴푸를 차례로 나눠주는데...
저마다 풍부한 거품을 내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고... 미세하게, 하얗게 일어난 거품을 머리에, 몸에 문질문질하면서 까르르. 몸과 머리를 헹구는 동안 스스로 뽀드득 소리를 찾아내면서 까르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바구니 속 신상 아이템들을 만끽하는 재미도 쏠쏠한 모양이었다. 그럴 줄 알고, 최화정 님 유튜브에서 사우나 바구니 속 아이템을 눈여겨본 이모가 그동안 여러 목욕용품들을 구비해 놓았지! 유기농 신상템들도 제법이었던 바구니.
온탕과 이벤트탕을 오가는 발걸음에 내내 총총 발랄함이 실려있어서 행여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헛기침으로 에헴.
말로 주의를 주지 않아도, "엄마, 세 번 말했다" 눈을 부라리지 않아도, 눈치껏 룰을 지키는 말 잘 듣는 마법이 통하는 목욕탕이라니.
물 안에서 목욕탕 바가지를 뒤집고는 밀어올라오는 압력을 짓누르다, 공기를 뽀글거리다 웃고... 바가지를 위아래로 맞대어 바가지를 튜브 삼아 수영하다 웃고. 값비싼 놀잇감이 없어도, 바가지 한 두 개만으로도 탄생하는 신박한 놀이들로, 즐거운 목욕탕의 시간은 늘 빠르게 흐른다.
작은 발들을 촐랑거리며 온탕과 이벤트탕을 아이들이 오가는 동안 난 물속에서 연신 스트레칭을 하는데... 하는 동작에 따라 이모/ 엄마 배 위에 앉아 다리 운동을 하다, 내 몸을 미끄럼틀 삼아 뽀르르르 내려가며 웃는 작은 몸도 있고, 물속에서 스쿼트 동작을 하며 서있는 나를 향해 물장구치며 다가와 와락 앉기는 작은 몸도 있어 나 역시 무척 행복해진다.
우리 모두 핸드폰, TV 등 전자기기 없이, 값비싼 놀잇감 하나 없이, 알몸으로, 단돈 만 원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공간.
다섯 명이 나란히 모여 앉아 얼굴에, 몸에 우유 마사지를 하고 있으려니 세신 해주시는 이모님이 우리를 알아본다. 앙증맞은 엉덩이들이 나란한 뒷모습을 찍어두고 싶다며 우리 아이들을 귀여워하시던 이모님은 "너네 이모/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 너희 넷 데리고 목욕탕 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야!" 내 마음속 생색내고 싶었던 마음을 대신 말하시며 강조해 주시던데...
어렸을 적 우리 세 딸들의 손을 잡고, 밀어도 밀어도 거무튀튀 얇고 짧은 국수가락 같던 때를 연신 밀어주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엄마 생각이 났다. 거칠게 때를 밀다 바가지로 물을 퍼, '찌끌던' 엄마의 모습은 '찌끌다'의 표준어 격인 '끼얹다'라는 표현이 더 생경할 정도였다. 고된 양육의 고충이 바가지 물을 끼얹던 스냅에 실렸다고나 할까. 목욕탕 매점에서 요구르트 하나 사주지 않던 엄마를 인색하다고 느끼면서 뿌루퉁하게 벌게진 살갗을 긁으며 나오던 내 어린 날이 생각났다.
지금의 나는, 때도 안 밀면서 유기농 바디 스크럽으로 각자의 목욕을 시키는 와중에도 애 넷을 목욕탕에 데리고 갔다며 생색을 낸다. 그때의 엄마는, 딸 셋에 자기 몸까지 온몸 구석구석 때를 밀면서 그날의 목욕탕 요금이 아깝지 않도록 뽕을 뽑았다. 이 역시 '본전을 뽑았다'라는 표준어로는 성에 안찰 정도의 애씀이다.
훗날 아이들이, 몸이 찌뿌둥하고 마음이 뾰로통할 때 언제든 유기농 신상템들이 가득한 사우나 가방을 들고 총총거리며 목욕탕에 갈 수 있었으면 한다. 살뜰히 각자의 몸을 만질만질. 천천히 샴푸하고 헤어팩을 즐기고 좋은 향과 감촉마저도 즐길 수 있기를. 목욕탕 안에서 입에 쏙 넣어먹는 주전부리에, 최화정 님만큼 상큼 발랄하게 행복해할 수 있기를. 이모와 함께 갔던 목욕탕에서 이모의 봉긋한 배를 미끄럼틀 삼아 내려가 온탕의 물에 첨벙거리던 때를 기분 좋게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각자, 이 목욕탕 추억이 훗날 몸과 마음의 면역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일상의 이벤트가 되길. 회복력을 이끌어줄 수 있을 설레는 시간이 되길. 돈 만원 내고 목욕탕 몇 번 데리고 가면서, 많이도 바라본다.
엄마의 매운 손에, 칭얼거리다 등짝을 몇 번 맞았어도 나에게 목욕탕은 좋은 기억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