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유원지에 산책하러 나갔다가
공중전화 박스에 거미줄이 있는 걸 봤어요.
아, 예전에 공중전화는 얼마나 귀했나요?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동전을 넣으며 상대방이 전화받기를
애타게 기다렸잖아요.
요즘은 다들 핸드폰이 있어서
언제든 얼굴 보며 통화하는 시대라
공중전화는 찬밥 신세가 되었더군요.
거미줄이 있는 걸 보니
공중전화를 건 사람이 한참 동안 뜸했고
공중전화 박스 마저 비스듬하게 서 있어서
왠지 금방 사라질 것 같이 보였어요.
고요하고 한적한 어느 산기슭에
아주아주 오래된 전화박스 하나가 있었어요.
이 산속에는 엄마 여우랑 아기 여우가 살고 있었어요.
엄마 여우는 아기 여우가 있어 기뻤어요.
아기 여우는 엄마 등에 폴짝 올라타서 미끄럼을 타듯이 내려오고
엄마 여우의 꼬리 끝을 폴짝 뛰어넘었어요.
“세상에, 우리 아기가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엄마 여우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엄마, 내가 요술을 부리면 더 기뻐하겠네?”
“뭐, 요술을 부린다고?”
엄마 여우는 자기도 요술을 부릴 수 없다며 아기 여우를 바라보며 웃었어요.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자 아기 여우가 조금씩 이상해졌어요.
기운이 없어 보이더니 춥다고 시름시름 앓았어요.
결국 엄마 여우의 품속에서 오들오들 떨던 아기 여우는
아주 싸늘해지고 말았어요.
엄마 여우는 날마다 구슬피 울고
눈물로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도록 울다가
입을 꾹 다문 채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우리 아기 덕분에 엄마는 그동안 참 행복했단다.
그래 기운을 내야지…….”
엄마 여우는 정처 없이 걷다가 불빛을 보았어요.
산기슭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었어요.
전화박스에 웬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어요.
전화박스 안에서 조그만 사내아이의 모습이 빠끔 비쳤어요.
“앗, 저건 사람의 어린아이잖아.
우리 아기도 사람이었다면 저 사내아이 또래일 텐데.”
사내아이는 수화기를 딸깍 내려놓고는 전화박스 밖으로 깡충 뛰어나왔어요.
엄마 여우는 깜짝 놀랐어요.
사내아이의 뒷모습에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 것 같았거든요.
그날부터 엄마 여우는 사내아이를 하루 종일 기다렸어요.
아쉽게도 사내아이한테는 꼬리가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내아이의 전화 목소리는 마치 엄마 여우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엄마, 오늘은 할아버지랑 읍내에 있는 기차역에 갔다 왔어.”
“어머나, 그랬어? 재미있었겠구나.”
사내아이가 말하면 엄마 여우는 나지막이 대답했어요.
아픈 엄마와 떨어져서 할아버지와 사는 사내아이는 자기 엄마에게 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엄마 여우는 사내아이에게 달려가 꼭 껴안아 주고 싶었어요.
머리카락이랑 얼굴도 싹싹 핥아주고 싶었고요.
하지만 사내아이가 놀라서 다시는 오지 않을까
꼬리를 몸에 찰싹 붙이고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어요.
산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어요.
어느 날 저녁, 산에서 내려온 엄마 여우는 전화박스에 불이 꺼져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오래된 전화박스가 고장이 나서 치워버린다고 했어요.
엄마 여우는 사내아이가 걱정이 되었어요.
멀리서 타박타박 발소리가 들려왔어요.
엄마 여우는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어요.
‘아, 내가 도울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할 텐데…….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 줄 게 없구나.
정말 미안하다, 아가야.’
엄마 여우는 가엾은 사내아이를 껴안듯 살며시 앞발을 뻗었어요.
‘여기에 전화박스가 하나 더 있다면…….
하다못해 내가 그 아이의 전화박스가 되어 줄 수만 있다면…….’
엄마 여우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굴렀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어머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엄마 여우가 꼿꼿이 선 채 어느덧 전화박스로 둔갑해 버린 거예요.
옆에 있는 전화박스랑 똑같이 말이에요.
엄마 여우의 전화박스에 환하게 불이 켜졌어요.
사내아이는 여우의 전화박스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어요.
“엄마야?”
엄마 여우의 가슴속에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으, 응, 그래, 엄마야…….”
엄마 여우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대답했어요.
사내아이는 내일이면 엄마가 있는 도시로 이사를 간다고,
이제는 전화를 안 해도 되고,
날마다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엄마 여우는 정신이 아뜩했어요.
이제 다시는 사내아이를 만날 수 없게 된 거예요.
“난 지금 너무너무 좋아, 엄마.
아, 빨리 엄마 보고 싶다!”
사내아이는 전화를 끊고는 밖으로 폴짝 뛰어나갔어요.
엄마 여우는 꿈에서 깨어난 듯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서 엄마 여우의 온기를 모두 빼앗아 갔어요.
엄마 여우는 고장 난 전화박스 안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지금까지 캄캄하게 꺼져 있던 전화박스가 천천히 밝아 오기 시작했어요.
엄마 여우는 수화기를 살며시 집어 들었어요.
“아가, 엄마가 요술을 부렸단다. 정말로 요술을 부렸어.”
전화기 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엄마 여우가 까맣게 모르는 사실이 있었어요.
전화박스가 엄마 여우를 위해서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짜내어 불을 밝혀 주었다는 것을
전화박스 불빛 아래, 엄마 여우의 행복한 얼굴이 환히 빛나고 있었어요.
고장 난 전화박스도
한 번도 요술을 부려 본 적 없던 엄마 여우도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기적이 일어나네요.
못 이룰 게 없네요.
"우리 아기가 기쁘면 엄마도 항상 기쁘단다."
엄마 여우의 말이 곧 우리의 말이에요.
"네가 좋아하면 나도 항상 좋아!"
"네가 행복하면 나도 항상 행복해!"
이 가을,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과
이런 따뜻한 전화를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