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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영숙 이모

(연작소설) 영이의 일기 3

by 민들레


안채에는 영숙 이모와 준호 아저씨가 살고 있고 안방 곁에 딸린 작은 방에 할머니가 산다. 할머니는 경상도 사투리를 썼기 때문에 나는 처음엔 할머니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할머니네 방 벽과 우리 방 벽이 맞대고 있지만 우리 부엌은 밖으로 따로 나 있다. 변소는 우리 방문을 열고 몇 발짝 가면 있는데 세 집 식구들이 모두 같이 쓴다.

겨우내 입고 있던 갈색 바퀴 그림이 그려진 치마를 아직도 입고 있는 할머니가 파란색 사기요강을 들고 힘겹게 마루로 올라가고 있다. 할머니 몸은 너무나 작고 가벼워 보여서 보는 사람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한 손에 든 요강을 금방 떨어뜨릴 것만 같다. 저 파란색 사기요강은 아침에 할머니와 함께 방에서 나오고 저녁때면 또 할머니와 함께 방으로 들어간다. 언젠가 할머니가 오줌이 든 요강을 방에서 간신히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영숙 이모가 소리를 질렀다.

-아유~ 할머니, 요강 떨어뜨리겠어요. 그놈으 사기요강 잘 들지도 못하면서 버리고 가벼운 스탠 요강으로 하나 사세요.

그때도 할머니는 그 합죽한 입을 오물오물하며 중얼거렸다.

-베리기는, 말짱한 것을 와 베리노.


요 며칠 할머니 몸이 부쩍 안 좋아 보인다. 할머니 몸은 풍선에서 바람이 조금씩 새어나가 훌쭉해지듯 기운이 보이지 않게 새어나가 쭈글쭈글해진 것 같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처럼 할머니 몸에 힘을 불어넣어 저렇듯 꼬부라진 허리가 다시 곧게 펴졌으면 좋겠다.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겨우 다리를 올려놓은 할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속해서 에유 에유 하는 소리를 흘린다. 할머니 얼굴이 핼쑥하다. 기운이 빠지다 못해 이제 아프기까지 한 모양이다.

“할머니, 아파요?”

내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할머니는 마룻바닥에 몸을 눕히며 힘겹게 중얼거린다.

“에유... 음음... 마당에, 모래가, 에유... 억수로 많아가, 에유, 음, 더러바, 볼 수가 읎어... 그거로 쪼매, 씰었등만, 에유......”


할머니는 지금밖에는 말할 기회가 없는 사람처럼 신음 같은 말을 힘겹게 토해내고 스르르 눈을 감는다. 할머니 얼굴은 땡볕에 몇 날 며칠 그을린 것처럼 새까맣고 주름 투성이다. 굵게 접힌 주름 사이는 세수할 때 꼼꼼히 씻어야 때가 끼지 않을 것 같다. 할머니는 이제 두 콧구멍으로 숨을 쉬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입을 벌리고 훅훅 숨을 토해내고 있다. 반쯤 벌려진 쭈글쭈글 합죽한 할머니 입이 재미있게 생겨서 나는 좀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할머니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는 오글오글 주름진 입술이 영락없이 닭똥구멍을 생각나게 한다. 시골에 살 때 우리 집엔 닭이 여러 마리여서 나는 자연스럽게 닭 똥구멍을 볼 기회가 많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녀라는 보라라는 아이가 갑자기 생각난다. 할머니는 내 나이를 물어보더니, ‘우리 보라 하고 동갑 아이가? 우리 보라도 너맹키로 이삐고 야무지게 안 생깄나.’ 라며 좋아했다. 영숙 이모가 사다 드린 단팥빵을 오빠 몰래 내게만 주며 내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나는 보라라는 애를 한 번도 못 봤다. 할머니가 우리 보라는, 우리 보라도, 우리 보라가, 하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보라라는 애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어쩌다가 보라 아빠만 할머니를 찾아올 뿐 보라도 보라 엄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엄마에게 영숙 이모가 껌을 짝짝 씹으면서 말했다.


-자식새끼 쌔빠지게 키워놔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니까요. 노인네가 청상과부로 외아들 하나 보고 수절하면서 일류대학까지 가르킨 모양인데, 결혼하자마자 지 애미를 드러운 물건 버리듯 버린 모양이에요. 뻔질뻔질 윤기 나는 집구석에 저렇게 꼬질꼬질한 노인네를 이라도 떨어질까 봐 들여놓고 싶겠어요. 한심한 노인네. 그래도 자식이라고 싸고 돌기는. 자기 아들 나쁜 소리 요만큼만 하면 기겁을 한다니까요.


문이 열린 할머니의 방 조그만 벽에는 할머니가 노인정에 나갈 때면 갈아입던 미색 스웨터와 통치마가 걸려있고 그 위쪽 벽으로는 할머니의 초상화와 함께 사각모를 쓴 보라 아빠의 큼지막한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사진 속의 보라 아빠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삼촌 같은 얼굴이다.

할머니는 아들 자랑을 하고 또 했다.

-자가 우리 아덜 아이가. 을매나 잘 생겠노. 인물 훤하겄다, 많이 배웠겄다. 우리 아덜만 헌 사람도 맻 안 될기라.

그러면 영숙 이모가 입 야문 소리를 했다.

-아들이 잘났으면 뭘 해요. 할머니를 이 지경으로 놔두고 있는데. 할머니가 죽었나 안 죽었나 가끔 와서 들여다보는 거 말고 뭐 있어요.

그러면 할머니는 고개는 절레절레 흔들며 영숙 이모를 나무란다.

-그런 소리 마라. 우리 아덜이 마음은 안 그런다. 어미 한태 그 이상 우째 하노. 지들도 살기가 심든데. 아덜이 흥청망청하고 난봉이나 부리고 하모 우짤뻔 했노. 내가 딱 굶어 죽제...... 효도가 벨기가, 밥이나 해 주고, 빨래나 해 주고, 그기 효도하는 기라.

할머니는 차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는 줄도 모르는 듯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풀어놓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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