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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큰 숲 Aug 16. 2024

바쁘다는 핑계

보고싶다는 한마디




" 내가 요즘 바빠서..." 란 말 뒤에 숨어있었던 나에게 솔직하게 물어본다 

" 너  비겁한 거 아닐까?"











광복절, 빨간 날을 맞아 친정에 다녀왔다.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

뭐 먼 거리라고 출근이 없는 빨간 날이나 되어야 다녀올까 생각을 하게 되는지....

출발하기 전에 빠뜨린 건 없는지, 아이들에게 씻어라, 머리 빗어라, 양말은 신었냐, 너희들 때문에 시간이 항상 딜레이 된다는 둥  큰소리치지만, 막상 큰소리치는 내내 나 또한 출발 준비 상태이긴 마찬가지다.  

엄마한테서 가져온 반찬통을 비우고 물기를 털어내랴, 가져다줄 물건 챙기랴 화장실 다녀오랴 미리 준비해둘 생각은 왜 항상 못하고 이 난리인지.. 휴..




광복절. 

날짜 개념, 숫자 개념 없는 작은 아이가 먼저 일어나 재잘재잘 거리는 소리에 찔끔찔끔 눈을 떠야 하나 더 자도 되나 고민을 하는데  내 휴대폰으로 릴스를 보고 있던 녀석은  엄마가 자고 있든 말든 질문을 쏟아 놓는다.


"엄마 오늘 어린이집 안 가는 날이야? "


" 으...응. "


" 엄마! 오늘 태극기 다는 날이래! 맞아?"


" 으,으응.."


" 광복절? "


" 응. 맞아.  "


"  광복절이 태극기 다는 날이야?  왜 태극기 달아? "


6살 궁금한 것도 많고 이제 대답을 해주면 기억을 할 수 있는 나이라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기억에 남을 만한추억 거리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한 시기란 생각을 갖게 하는 때여서 나름 대답을 해주다 보니 늦잠의 여유는 자연스레 내려놓게 되었다.

한동안 태극기를 게양할 생각조차 못 하고 살다가 작은 녀석이 묻는 물음에 대답을 해주며 그때야 태극기를 찾아 부랴부랴 게양하면서 아는 척을 해댔다. 마치, 엄마 아빠는 광복절에 대해 엄청나게 아는 사람처럼 보였을 거다. 

실상은 태극기를 찾느라 거실 펜트리며, 베란다 창고며 왔다 갔다 아빠와 서로 여기에 두지 않았냐며  뒤적뒤적 거리면서 헤집어댔다. 

태극기를 마지막으로 계양한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확실한 건 이사 와서 게양한 적은 없으니 적어도 3년이 넘었다는 거.


엄마의 늦잠을 깨웠으니 아침은 간단히 라면으로 끝냈다.

설거지까지 끝내놓고 좀 쉬어 볼까 소파에 등을 기대니  그제야 읽지 않은 톡이 눈에 들어온다. 


' 옥수수 먹고 가지고들 가라'


엄마의 이모티콘 없는 투박한 문장, 꼭 애교 없는 엄마의 말투를 그대로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어서 톡이 왔다


' 지금 집으로 가는 중 와서 일들 해.'


동생이 밭에서 집에 오는 중인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니 대답은  한 시간이 훌쩍 넘어  도착했다.


' 일 읎어. 옥수수 먹으러 오라고 '


동생은 다른 약속이 있어 술을 먹어 못 가겠다 했고, 나는 엄마 아빠를 보러 갔다.

일 없으니 옥수수 먹으러 오라는 대답이 오기까지 1시간이 넘는 동안 엄마의 수만 가지 마음을 읽었으므로....




3주 전쯤인가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던 날, 아빠는 광복절 전날이 말복이고 광복절이 빨간 날이니 모여서 밥이나 먹자고 하셨다.

술이 오가는 자리, 다들 취기가 어느 정도 있는지라 그냥 흐르는 말이겠거니 했었던 거 같다.

평소 윗 사람을 많이 대하는 애들 아빠는 말복에  진짜 모여야 되는 거 아니냐며 내게 물었다가. 

' 글쎄 모르겠네.'라는 내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빠한테 전화를 드렸던 모양이다.


" 아버님이 오늘 오지 말라시는데?! 그때, 말복에 모이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말복이 하루 지난 광복절에 친정집에 넘어가니 우리가 올 줄 아셨던 건지  이미 옥수수를 한 바구니를 넘게 쪄 놓고,  토마토며 가지며 깻잎 김치까지 담가 소담하게 나뉘어  있었다.





                                                 <얼룩덜룩 흉터 투성이 방울토마토>






" 치...' 그냥  보고 싶다고 오라고 하면 되지,  이렇게 다 해놓고 우리 안 오면 어쩌려고? "


엄마는 내 말에는 대꾸도 않고 신발도 안 벗은 애들에게만 말을 걸었다.


" 강아지들! 밥 먹었어 안 먹었어? 너네 엄마 또 바쁘다고 밥도 안 주고 데리고 댕기지? "


무더위에 할머니 집에 도착해서도 아이스크림부터 꺼내드는 애들 앞으로 엄마는  아직 뜨신 김이 나는 옥수수를 들이밀어주셨다.

 그 뜨거운  옥수수를 집어먹기 좋으라고 반으로 뚝뚝 끊어주는 할머니의 손을 보면서도 배시시 웃으며 아이스크림만 먹는 애들이 뭘 그렇게 예쁜지 엄마는 옥수수 뜨거워서 싫으면 토마토도 먹고 수박도 따왔으니 잘라 주겠다고 하신다.


" 나나 줘 나나. "


" 너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고개 하나 넘어오길 빨간 날 되어야 나 와? "


" 나? 나 바쁘지, 회사 출근하고 집에 와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그럼 하루 다 가. "


" 너 하도 안 와서 복숭아 따 놓은 거 다 상했어. 아깝게. "


" 안 오는 구나 싶으면 엄마랑 아빠가 다 먹지 그랬어. 아님  오라고 전화를 하던가 "


"  맨날 바쁘다매!  운동한다 그러고, 공부한다 그러고 와야 오는구나 하지 "


" .... !.... "






                                                   < 직접 농사 지으신 옥수수>






나는 그동안 그랬다.

맨날 바쁘다고  몸이 피곤하다는 둥, 회사에 일이 있다는 둥..  

엄마 아빠의 투박한 카톡 말투를 두고 딱  '현실 말투 그대로네'까지만 생각했는데, 

그동안  엄마랑 아빠는 바쁘다 말하는 딸내미의 눈치를 보고 계셨구나...




" 엄마, 어제 복날이었는데 아빠랑 맛있는 거 드셨어? "


" 아니. 밭에 가서 옥수수 따고, 가지 따고,  강아지들 주려고 수박도 따고 그랬지."


" 맛있는 거 먹을까?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어?  "


" 없어. 호박 따 온 거 있어 볶아줄 테니까 밥 먹고 가. 너 집에 가서 밥하려면 또 움직여야 되잖아. "





                         <생김새가 작년만치 못하다고 해도 맛만 좋은 가지와 호박>





엄마의 말이 시큰하게 아렸다.

나 어릴 적부터 일하고 살림했던 우리 엄마.

내가 엄마가 되고, 또 일하는 엄마가 되니  울 엄마도 나를 보는 게  편하지 만은 않으시겠지.


" 됐어,  배 안 고파 앉아서 좀 쉬어. 나 조금 있다가 갈 거야. "


간다는 말이 서운했는지 아빠는 얼른 애들 아빠한테 말을 거셨다.


" 양서방은 뭐가 먹고 싶냐. 어제 전화해서 맛있는 거 사 달라 그랬잖아. 뭐  먹을래? "


요즘 들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오지도 않고서는, 금방 간다는 딸의 말에 얼른 사위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묻는 아빠를 보니 일찍 넘어가 운동을 하겠다 마음먹었던 나의 결심은 대단히 큰  이기심이 아니었나 하는 결론에 닿았다.


결국 시큰한 마음을 가리려 평소 보지도 않는 티비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엄마가 볶아주는 호박볶음에 밥 한공기를 다 먹고, 두 손엔 엄마 아빠의 피 땀 그리움을  바리바리 싸 들고 집에 왔다.





                             <휘고 못생겼지만 웃음이 나는 오이와 토마토... 역시 맛있음>





아이들 어릴 때는 밥하기 싫다고 찾아가고 

아이들 아빠 훈련 갔다고 혼자서 애들 볼 자신 없다고 데리고 가고

어떤 날은 내일 새벽 출근이니 아이들 봐달라고 찾아가고

참 뻔질나게도 찾아갔었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친정 멀리 살아도 잘 만 갔었는데


뭐 그리 대단한 거 하겠다고! 

운동한다고 피곤해서 못 가.

뭐 대단한 공부 한다고 또 못 가고,

결국은 바쁘다는 핑계 뒤에 숨어   

내 마음 편하자고 이기적이었던 거지 

그게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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