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키오스크> 를 읽고-
“형이 뭘 안다고 난리를 치는 거요?”
“뭐? 이 새끼가 형한테 뭐라고 했노?’
귓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밥상이 뒤엎어진다. 또 시작이다. 아빠와 삼촌은 악다구니를 쓰며 싸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7명의 대가족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막냇삼촌과 같이 살았다. 늦은 나이에 막둥이로 태어난 삼촌은 또래들보다 지능이 약간 떨어졌다. 말도 조금씩 더듬었다. 삼촌은 할머니의 강아지,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게 못내 서운했는지 아빠는 술만 먹었다 하면 고래고래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띠동갑 삼촌에게 질투라도 느꼈던 건가?) 질투심은 차곡차곡 쌓여 분노가 되어서 집안 살림을 다 부쉈다.
큰소리에 깜짝깜짝 잘 놀라는 열 살의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런 집이. 항상 조마조마했고 곧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이 가슴을 조였다. 가족끼리 왜 저렇게 죽일 듯이 싸우는지 그때의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줍음 많고 친구 사귀기가 힘들어서 긴장감 가득한 학교 생활이었다. 얼른 조용한 집에서 쉬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집이 학교보다 더 시끄러웠다. 저녁 식사 시간에 아빠와 삼촌, 할머니가 싸울 것 같은 분위기이면 얼른 밥을 입안에 가득 넣고 후다닥 동생과 나의 방이었던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곳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치유해주는 나만의 응급실이었다. 그림책 『키오스크』에서 주인공 올가가 키오스크(소형판매대, 신문 잡지 등을 파는 간이판매대) 속 자신만의 세상에서 여행잡지를 보며 행복해하듯이 다락방에서 위로받고 편안함을 느꼈다. 고모들이 결혼 전 사용하던 오래된 전축에 헤드셋을 끼고 당시 빠져있었던 인기가요 테잎을 들으며 가족들의 폭언이 오가는 1층 거실에서 나를 분리했다.
하지만 올가가 키오스크에서 24시간을 보내며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 하듯이 나도 다락방 세상에서 갇혀 있었다. 가족들과 대화도 거의 하지 않고 학교와 집, 다락방을 오가며 매일매일 버텼다. ‘지긋지긋한 이놈의 집구석 서울로 대학을 가서 다시는 안 돌아와야지.’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었다.
다락방이 없었다면 예민한 16세 소녀는 가출을 몇 번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곳 창가에선 둥근 달이 보였는데 내 이름을 영어로 MOON이라고 적다 보니 달에게 친근감이 들었다. 그 달을 쳐다보며 힘든 마음을 달에 토로했다. 그러다 보면 슬픔도, 분노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인 서울’ 하겠다던 목표가 수능을 망쳐서 실패했고 재수는 남들보다 늦은 출발이라는 생각에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부산에 있는 대학을 다니게 됐다.
그토록 바라던 ‘벗어남’의 목표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림책 속 ‘올가의 키오스크’처럼 다락방에서 숨어 지냈다. 가족들 누구와도 대화하기 싫었다. 낡은 전축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영화 잡지를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학교 수업도 자주 빠졌다. 밤을 새워 비디오 테잎을 봐서 늦잠을 자버리니 지각을 할 바에야 차라리 결석을 했다. 다락방에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
그런 다락방을 억지로 벗어나는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부도가 났고 부모님과 나, 동생은 야반도주 하다시피 집을 떠나게 되었다. 유년시절을 함께한 다락방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나만의 키오스크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도망칠 때 갖고 가지 못한 수 백개가 넘는 가수들의 테이프와 차곡차곡 모아놓은 영화잡지들은 할머니가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오직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다.
결혼을 하고 공간은 바뀌었어도 열일곱 소녀에서 멈춰버린 것 같다. 남편과 아이가 출근과 등교를 하면 완전히 집순이가 되어서 나만의 키오스크, 이제는 다락방이 아닌 부엌 식탁에 앉아 요즘 최애가수인 폴킴의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는다. 전세살이를 전전하다가 결혼 7년만에 우리 집을 마련했다. 인스타에서 봤던 예쁜 집처럼 거실을 한쪽 벽이 책장으로 꽉 찬 서재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책이라고는 웹소설, 만화책만 보는 신랑이 결사반대했고 갈등 회피자인 내가 졌다.
책장 대신 85인치 TV와 리클라이너 소파가 거실을 차지하고 있다. 다락방처럼 숨 쉴 수 있는 키오스크가 절실했다. 누구의 엄마, 딸, 아내, 며느리가 아닌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이번엔 신랑에게 물러서지 않고 부엌 식탁을 서재로 만들어 버렸다. 4인용 직사각형 식탁 위에는 노트북, 카카오의 캐릭터인 어피치모양 블루투스 스피커, 아이가 만든 회전목마가 그려진 무드등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큰 맘먹고 구매한 투명 아크릴의 독서대와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앙리 마티스의 그림이 그려진 접이식 책장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로 가득 채워진 식탁에선 더 이상 식사는 불가능하다.
식탁에 앉아 유튜브 편집을 하고 책을 읽는다.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거나 유튜브에서 강의를 듣기도 한다. 열일곱의 내가 마흔 살의 나에게 찾아 오는 시간이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빠지지 않고 그럼 도대체 밥은 어디서 먹냐고 묻는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화이트톤의 1인용 좌식 테이블을 가리키며 “저기서 먹죠.”라고 대답한다. 신랑은 비싼 식탁을 사놓고 왜 밥을 거지처럼 땅바닥에 앉아서 먹어야 하냐고 툴툴거리지만 어쩔 수 없다. 다락방은 사라졌고 이젠 부엌 식탁이 나의 응급실이다. 신랑이 볼멘소리할 때마다 씨익 웃으며 “여보야, 너~~~무 사랑해.”라고 한마디 해주며 오늘도 나만의 키오스크에서 마음을 토닥이는 중이다.
-관련 그림책-
꿈을 찾아 떠나는 올가의 기상천외한 여행
키오스크는 요즘 식당이나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터치스크린의 무인 단말기를 가리키지만, 원래 이슬람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원형 정자를 일컫는 말로 길거리의 간이 판매대나 소형 매점을 뜻하지요. 이 키오스크 안에 하루 종일 앉아 마치 정말 기계 단말기처럼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어요. 바로 이 그림책의 주인공 올가입니다. 2021년 피터 팬 상 수상작이자 동명의 애니메이션으로도 잘 알려진 이 책 『키오스크』는 사고에 가까운 우연한 행운으로 꿈을 찾는 여행을 떠나게 된 올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출처: 예스24 책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