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비가 와도 괜찮아!>를 읽고-
“엄마, 비 오는데 왜 데리러 안 왔어? 우산 없어서 친구 랑 같이 쓰고 왔잖아.
다른 엄마들은 다 우산 가지고 왔다고!”
“헉~비 오나? 낮잠 잔다고 몰랐네. 그래도 같이 쓰고 와서 옷은 안 젖었으니 됐네. 뭐.”
아이는 씩씩거리며 어금니를 꽉 깨무는 동시에 나를 향해 눈을 흘긴다. 야속한 눈빛이다. 사실 나는 비가 내리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는 햇살이 비쳤고 흩뿌리듯이 내리는 여우비라 금방 그칠 것 같았다. 비 조금 맞는다고 감기에 걸리겠어? 젖은 옷이 몸에 착착 감기는 찝찝함을 참 싫어하는 녀석이다. 그럼 넉살 좋은 아이이니 친구한테 같이 쓰자고 말하겠지……. 마음대로 결론 내리고 학교 앞으로 마중 나가지 않았다.
무심하고 게으른 못된 엄마다.
이 비슷한 상황이 삼십여 년 전에도 있었다. 그림책 『비가 와도 괜찮아』를 읽으며 과거의 그 장면으로 회귀했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1학년 교실에 한 여자아이가 창문을 쳐다보고 있다. 먹구름이 잔뜩이다.
‘어떡하지? 오늘 아침에 우산 챙기라는 엄마 말 깜빡했는데…. 비 맞는 거 너무 싫은데. 가방 젖으면 책도 젖어서 쭈글쭈글 해질 텐데. 옷 다 젖어서 남자애들이 놀리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들로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들리지 않는다. 4교시 내내 불안함을 떨칠 수 없다.
곧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데 수업을 마치는 벨 소리, <엘리제를 위하여> 멜로디가 날카롭게 고막을 때린다. 제발 엄마가 있어라. 우산 들고 학교 앞에 있어라. 여자아이는 마법 주문을 반복한다. 꼭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며.
실내화를 갈아 신는 신발장 앞에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분홍색 등 무지개가 생각나는 우산들을 든 채 아줌마들이 서 있다. 그녀들은 자신의 아이를 찾으려고 좌·우, 위, 아래로 눈알을 굴린다. 그곳은 어느새 정신없는 자갈치 시장이 된다. 나가려는 아이들과 큰 소리로 아이 이름을 불러 대는 엄마들로.
북새통 속에서 여자아이는 아주 천천히 신발을 갈아 신는다.
짝꿍은 엄마가 왔다며 신이 나서 쪼르르 뛰어간다.
엄마와 아이들은 2인 1조 한 몸이 되어 색색깔 우산과 함께 총총총 사라진다.
결국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양장점에서 쉬지 않고 미싱을 박고 있다. 학교 랑 가까우니 사장님께 말하고 짬 내서 올지도 몰라. 그런 헛된 기대를 했다.
‘비 맞는 거 너무 싫어. 쥬쥬 공주가 그려진 내 핑크 가방이 젖는 것도! 친구한테 자랑하려고 신고 온 새로 산 빨간 구두도 엉망진창이 될 거라고!’
그 순간 누가 아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시도 때도 없이 아이를 놀려 먹는 고약한 놈이다. 엄마 뱃속에서 오이만 먹었는지 길쭉한 얼굴에 눈이 단추 구멍보다 작은 못생긴 놈.
“야, 너 우산 없어?”
(보면 모르냐? 못생긴 게) “…….”
대답을 하기 싫어 얼굴을 홱 돌렸다. 누구라도 시비를 걸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기분이다.
눈치코치 밥 말아먹은 녀석은 옆에서 쫑알쫑알거린다.
“내 우산 멋지지? 아빠가 사줬는데 너도 쓰게 해 줄게.”
촌스러운 로봇이 그려진 제일 싫어하는 색깔의 파란색 우산이다.
“됐어. 필요 없어.”
매몰차게 거절하고 후다닥 운동장으로 아이는 뛰어갔다.
길쭉한 놈은 술래잡기하는 줄 아는지 운동화도 꺾어 신고 끝까지 따라온다.
달리기는 꼴찌를 도맡아 하는지라 도망가길 멈췄다. 귀찮은 녀석. 따라오지 마!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그 녀석보다 비 맞는 게 더 싫다. 반짝반짝 빛나는 진주 모양 보석이 달린 빨간 구두는 오늘 처음 신은 거다. 벌써 흙탕물이 반쯤 묻어 버려서 엄마에게 혼이 날 게 뻔하다.
비 올 것 같으니 신고 가지 말랬는데 오늘따라 고집을 부렸다. 투박하고 촌스러운 장화보다는 광이 나는 구두가 신고 싶었다. 비 맞아서 편도라도 부어 고열이 나면 엄마의 잔소리는 열 배 이상 늘어나겠지.
여자아이는 마지못해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양장점 있거든. 그 앞까지만 같이 써.”라고 차갑게 말한다.
녀석이 씨~익 앞니 빠진 입을 벌리고 바보같이 웃더니 우산을 펼쳤다.
그러나 두 명이 같이 쓰기에는 우산이 너무 작았고 어깨를 딱 붙이고 걷는 건 질색이었다.
우산을 쓰고 가는 내내 오지 않은 엄마를 원망했다. 양장점 근처에 와서 녀석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책가방을 머리 위로 든 채 후다닥 뛰어갔다.
우산 씌어 줬다는 것 딴 애한테 말하면 죽여버릴 거라고 악다구니를 쓰며.
집에 돌아와 보니 역시나 직사각형 모양의 책가방은 흠뻑 젖고 말았다. 방수기능이 없는 지라 교과서와 알림장은 구운 오징어처럼 쭈그러들었고 젖은 가방에선 꼬리 꼬리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나에게도 그림책에 나오는 해파리 우산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거운 책가방 대신 수족관에서 봤던 크고 투명한 해파리가 머리 위로 올라가 집까지 같이 걸어와 줬다면 엄마를 원망하지도, 맨날 머리를 잡아당기고 울보라며 놀려 대는 이 놈한테 굽히고 들어가지도 않았을 텐데.
하루 종일 미싱을 박느라 손이 퉁퉁 부어 저녁에 집에 온 엄마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역시나 잔소리가 쏟아진다. 바쁜데 어떻게 가냐며, 우산 씌어 준 친구한테 고맙다고 하라고. 쳇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날 이후로 나는 날씨가 조금만 흐리다 싶으면 우산을 챙겨서 등교했다. 그 오징어 놈이랑 같이 우산 쓰는 일 다시는 하기 싫어서. 30년이 지난 현재는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네이버 클로바’에 오늘의 날씨를 물어본다. 비가 오면 마중 나가는 대신에 아이의 두 손에 우산을 쥐여주기 위해서.
아이도 해파리 우산을 상상하며 날 원망하려나?!
-관련 그림책 소개-
비가 오는 날 데리러 오는 사람이 없는 아이의 현실을 천진한 상상력과 가족의 사랑으로 위로해 주는 유쾌하고 발랄한 그림책!
우산 대신 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내 머리를 가려줄 커다란 나뭇잎이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어요. 가방을 머리 위로 쓰면 어때요? 비닐을 뒤집어 쓰면? 나만의 특별한 우산은 뭐가 될 수 있을지 비가 오는 날 한번 찾아보세요.
-출처 예스 24 책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