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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smilewriter Oct 18. 2024

회사옥상에서 달리기 하는 남자 3

작가라는 꿈을 들춰보는 아라


아라는 시도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아라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일이 있은 후, 아라는 고통을 잊기 위해 뭐든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하나를 시도했다가 금방 다른 것으로 옮겨 시도했다.
아라는 잊기 위해 사는 사람 같았다. 자신의 신체를 힘들게 해야만 즐거움을 느끼는 쾌락주의자처럼 일을 찾아 했다. 이것저것 찾아 했다. 통장이 되어 회의도 가고 이집저집 전달해야 할 서류나 확인받아야 할 내용들을 완료했다. 아라는 온갖 자아성장 강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연을 듣고 연극, 미술, 영화, 뮤지컬, 오페라 등을 관람했다. 본인의 sns에 매일 한 편 이상의 글을 쓰고 타인의 sns에 들어가 공감과 댓글을 남겼다. 예술에 문외한인 아라였지만 2년 전부터는 기타, 크로마하프, 아카펠라, 보태니컬 아트, 민화 등을 시도했다. 동호회도 가입해 모임에 수시로 갔다. 아라는 시도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어느 날 친구인 현주가 이것저것 시도만 하고 있는 아라에게 충고했다.
”아라야, 네가 남편 죽고 나서 충격이 큰 건 알겠는데, 그래도 자기 시간도 없이 지금처럼 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넌 지금 시도만 하길 수 십 차례잖아. 그걸 꼭 해야만 하거나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도라는 그 자체로 만족하기 위해 시도하는 거 아니야? 넌 2년간 매일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뭔지 알아? 시도하는 중이야란 말이야. 너 앞으로 시도하는 중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고 있어'라고 말해."
아라를 지켜보던 친구는 시도라는 핑계로 시도 중독에 빠지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행동하라고 조언했다. 아라는 '시도 중독'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네 이야기야"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일한 친구인 현주의 말을 아라는 곱씹어봤다.
“아라야, 너의 성장, 발전을 위해 어렵고 힘들어도 계속 시도해야겠단 마음의 울림이 안 온다면, 즉 본인의 것이 아닌 것 같다면 억지로 붙잡아두지 마. 그런 생각이 들 땐 안 하는 게 좋아. 아라는 시도했다가 이 길이 아니다 싶은 때에는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과감하게 시도를 중단하는 게 오히려 용기 있는 행동이야. 반대로 더 늦기 전에 네가 꼭 해야겠다 생각되는 게 있으면 무조건 시도해. 뒤돌아보지 말고 그냥 시도해. 곰곰이 생각해 봐. 너를 위해 최선의 것을 찾아 시도하고 다른 것은 잘라내야 해.”
사실 아라도 알고 있었다.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위안을 얻을 뿐 자신이 진정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는 것을. 아라는 제일 간절한 꿈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있던 것, 고등학교 때 꿈꾸었던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떠올랐다. 도망치기만 했던 그 꿈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꿈을 다시 꺼냈다. 자신이 작가라는 꿈을 꾸게 했던 많은 일들을 생각했다.
10대였던 어느 날 플라타너스 나무가 도로에 쪽 이어져 있던 길을 걸어갔다. 플라타너스의 갈색빛을 띠고 있는 동그란 열매가 보도블록에 많이 떨어져 있었다. 아라는 플라타너스가 초록빛일 때는 큰 잎의 모습이 싱그럽게 느껴졌으나 가을이 되면서 잎의 색도 흉측하게 변해간다고 생각했다. 둥근 열매가 밉게 보였다. 아라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땅만 바라보며 걸었는데, 한 나무 밑에 책이 가득 놓여있었다. 아라는 무심히 지나가다가 멈췄다. 어떤 책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끈으로 묶어져 있는 책꾸러미를 조심스레 풀었다. 오래된 듯한 소설, 에세이 전집, 단편소설집 등이 있었다. 보도블록에 있던 책꾸러미는 주인이 잘 보관했는지 중고서점에서 산 책들보다 더 깨끗해 보였다. 헌 책을 자주 사 본 경험이 있었기에 남이 보던 책이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아라는 눈을 번뜩이면서 책을 살폈다. 볼만한 책은 모두 챙겨 가방에 넣거나 손에 들었다. 그중 아라의 관심을 끈 노트가 있었다. 누군가의 필기노트였다. 어떤 내용이 적혀있을까 아라는 궁금했다. 책 사이에 두꺼운 노트 몇 개 중 하나를 열어보았다. 노트에는 책주인인 듯한 사람의 일기가 적혀있었다. 일기가 처음 시작된 날짜를 보니 4년 정도 전이었다. 고등학교 친구 이야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을 잃고 혼자 옷수선집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엄마에 대한 감정, 가정 형편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형에 대한 미움, 이성, 결혼, 미래의 아내와 자녀에 대한 생각, 곧 가게 될 군대, 미래의 꿈에 대해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글 쓴 당시는 고등학생이었고 지금은 어른인 누군가의 아주 비밀스러운 부분이 일기장에 있었다. 누군가를 몰래 엿본 것 같다. 아라는 잘못된 일을 한 것처럼 불안했고 미안했다.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나머지 책들만 들고 나오려 하는데 자꾸 일기장이 궁금했다. 아라는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몇 걸음 더 가면 그 일기 노트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라는 사생활을 몰래 엿본다는 미안한 마음보다 궁금한 마음이 더 강했다. 좀 전에 본 일기장의 한 부분이 자꾸 생각났다.
책을 통해 작가의 생각들을 엿보게 되지만 모르는 이의 삶에 대한 기록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여러 권의 책과 일기장을 들고 도망치듯 뛰어왔다. 집에 와서 일기장을 펼쳐 급하게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을 그려봤다. 말풍선을 그리듯 주인공 옆에 성격,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꿈꾸는 것, 친구 등을 썼다. 일기장의 주인공과 책주인은 동일인인 것 같았다. 책에 있는 줄 그은 흔적, 끄적여놓은 낙서가 일기장에 있는 글씨체와 비슷했다. 아라는 일기장 내용과 책주인이 그은 줄, 짧게 메모한 글 등을 종합해서 한 사람을 창조했다. 어떤 존재를 만들어갔다.
아라는 남의 마음을 엿보고 있다는 미안한 마음도 잠시 뿐이었고 공감이 가는 존재, 본인과 생각이 비슷한 존재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만을 했다. 오늘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 중에 일기의 주인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미묘한 감정에 빠진 아라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자신의 은밀한 부분이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다고 생각하면 일기의 주인공은 노트를 파쇄하거나 불태우지 않은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청소년 시절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책과 일기장을 버린 사람이 누군지 아라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라는 누군가와 생각의 일부분을 함께 나누면서 그의 생각에 공감했다. 생각이 비슷한 점을 발견했을 때는 설레기도 했다. 그때부터 마음을 함께 나누고 공감 가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열망도 잠시였다. 아라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도'를 멈추었다. 그러다 갑자기 '시도'를 시작했다.
갑자기란 말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뭔가를 하거나 맞을 때 쓰는 표현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두 가지 경우이다. 좋은 일 또는 나쁜 일 둘 중 하나이리라. 왜냐하면 일상적인 일, 별로 관심이 안 가는 일에는 '갑자기'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대체로 놀란 경우 '갑자기'라는 표현을 쓴다. 아라는 이 단어를 좋아한다. 아라를 설레게 하는 단어이다. 갑자기 아라는 잠들어 있던 꿈을 꺼냈다. 아니, 갑자기가 아니라 남편에 의해 아라 속에 꾹꾹 눌러있던 소망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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