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린이 다이어리 73
눈이 떠졌다. 아직 창밖은 어두컴컴하다.
어젯밤 자기 전까지만 해도 오늘 아침 비가 온다 했었다. 실시간 비 예보는 수시로 바뀌니 믿을 수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살짝 열고 밖을 살폈다. 역시나 비가 오지 않았다.
내심 실망스러웠다. 비가 왔으면 마음 편하게 더 잘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미음이 들었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런 게으른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확실히 몸과 마음이 무뎌진 것이 맞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신어보는 러닝화, 쿠션감이 좋았다. 집에서 일산호수공원까지 약 10분 거리다. 천천히 워밍업 하면서 가기 딱 좋은 거리다. 바람은 의외로 선선했다. 다만 확실히 비가 오긴 할라나 보다. 습했다. 그래도 후덥지근한 것보다는 선선한 날씨가 낫다.
일산호수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스마트와치 달리기 모드를 켜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가볍게, 그리고 천천히. 그동안 연습한 대로 발볼이 지면에 먼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발 뒤꿈치에 충격이 최대한 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발을 부드럽게 디뎠다. 천천히 달리니깐 발 뒤꿈치에 충격이 거의 없었다. 아직 어둡다. 일산호수공원의 중심인 한울 광장에는 인적없이 가로등불들만이 공원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이 고요함이 그리웠다.
왼손을 들어 속도를 보았다. 시간당 7분~8분 페이스였다. 심박수는 110 bpm. 천천히 달리니깐 스마트워치를 여유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빠른 속도(시간당 5분 30초~6분 30초 페이스)로 달리면 스마트와치를 자세히 확인할 여유가 없다. 500미터 넘게 달렸을까? 발바닥은 아직 이상무! 달릴만했다. 산책로에 들어서니 저 멀리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몸에 열이 오르는지 왼 허벅지가 가렵더니 배 양쪽이 가려웠다. 양손으로 배 양쪽을 벅벅 긁었다. 그래도 아직 호흡도 괜찮고 다리 상태도 좋았다. 나는 계속해서 발걸음에 집중하면서 달렸다.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새벽 러닝의 매력은 고요함이다. 온갖 소리가 잘 들린다. 발걸음 소리를 들으니 박자가 빠른 것이 나보다 빨리 달리는 것 같다. 곧이어 남성 러너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예전 같으면 따라 잡히지 않으려고 두 발에 힘을 내서 속도를 냈을 테지만, 괜한 호승심에 오랜만에 달리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스마트와치를 보니 시간당 6분 58초 페이스였다. 생각보다 페이스가 괜찮았다. 멀어져 가는 다른 러너의 뒷모습을 보면서 페이스를 유지했다. '지금 이렇게 달리는 게 어디냐.'
1km 표지판을 지나 화장실 근처에 이르니 '꼬끼오~'하며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보 닭 같으니라고. 아직 날이 어두컴컴한데도 목청껏 울어대는구나!' 아직 날이 밝을 조짐이 없었다. 저 멀리서 옷을 맞춰 입은 한 무리의 러너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산책 나온 이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땀이 나진 않았다. 천천히 달려서 그런 것일까? 날이 선선해서 그런 것일까? 호흡은 양호하다. 심박수는 130 bpm 대다. 천천히 달릴 때 심박수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는지 궁금해서 계속 심박수를 확인했다.
오랜만에 달리는 일산호수공원. 지금 달리는 구비 구비 이 길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반가웠다. "탁! 탁! 탁! 탁!" 내 발걸음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새삼 내가 다시 달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발은 아직 상태가 괜찮았다. 오래간만에 달려서 그런가 자꾸 상체가 살짝 앞으로 기울어져 발에 무게가 실렸다. 정신 차리고 상체를 수직으로 세웠다. 어느새 2km 표지판이 눈앞에 보였다. '그래. 잘 달리고 있어.'
새벽 달리기가 좋은 점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달리는데 걸리적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천천히 달리는 내가 다른 러너에게 걸리적거리는 것은 아닐까?' 산책로 중간을 달리다가 그런 생각이 들어 다른 이들이 추월하기 쉽게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땀이 흘렀다. 다행히 머리띠를 해서 얼굴에 줄줄 흐르진 않았다. 2km 넘게 달렸는데 머릿속에서 '잠시 걷자'는 유혹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일산호수공원을 쉬지 않고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앞에서 나를 지나쳐간 러너들이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들은 어디서 돌아서 온 걸까? 나를 앞질러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는 것일까? 달리는 속도가 그럴 리가 없는데.'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탁! 탁! 탁! 탁!"
속도는 7분 페이스 초반, 심박수는 140 bpm. 천천히 달려도 심박수가 계속 올랐다. 천천히 달리면 심박수가 오르다가 어느 정도 선에서 유지될 줄 알았다. 그래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격렬하진 않았다. 달릴만했다. '이 페이스대로 계속 달리자.' 하늘이 붉은 빛을 띠며 날이 밝아왔다. 산책로를 밝히던 가로등불이 꺼졌다. 여전히 미드풋 스트라이드가 잘 유지되고 있었다. 오른발 통증은 없었다. 문뜩 속도를 높여볼까 하는 유혹이 들었다. '당분간은 천천히 달리자.' '후우!' 깊게 숨을 내셨다.
3km 표지판을 지나는데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이 또한 반가웠다. '다른 자연의 소리가 있었는데 내가 미처 못 들은 것일까?' 이제 곧 날이 추워지면 처량한 부엉이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 괜히 귀가 뚫린 것 같았다. 아직 몸 상태는 괜찮다.
'오늘은 욕심내지 말아야지. 이 페이스로 일산호수공원 1바퀴만 달리자'라고 계속 스스로를 다독였다. 심박수는 150 bpm. 천천히 달려도 시간이 지나면 심박수가 높게 올라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천천히 달리는 조깅도 충분히 운동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호수교 밑을 지나 언덕길이 눈앞에 보였다. 천천히 달리니 언덕길도 부담이 없었다. 날이 밝아와서 그런지 러너들, 산책로들이 많아졌다. 4km를 앞두고서 드디어 유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쉬엄쉬엄 걸어도 돼." 무시하고 달렸다.
고양꽃 전시장 앞에는 주말 일일장터 오픈을 준비가 한창이었다. '한 바퀴가 얼마 안 남았다. 이 페이스만 유지해서 한 바퀴만 채우자.' 한걸음 한걸음. 1바퀴를 완주했다. 심박수는 160 bpm. 달리기를 멈추었더니 몸에 열이 후끈 달아오르며 얼굴에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무사히 일산호수공원을 달렸다. 시간은 41분 25초. 예전 28분에 비하면 많이 느려졌다. 하지만 '다시 달릴 수 있는 것이 어디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몸아 고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