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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 Mar 31. 2021

나도 사랑할 수 있을까

학교 급식에 흰 우유가 나오는 날이면,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먹고 좀 하얘지라며 내 책상 위에 흰 우유를 잔뜩 쌓아 놓았다. 홧김에 흰 우유를 마셔대서 인지,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다 자라서, 다른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나와 있었다. 다행히 덩치가 커지니 더 이상 얼굴이 까맣다고 놀리거나 왕따를 당하는 일은 없어졌다. 


키순으로 번호를 매기던 5학년 때 여자아이 중에 제일 끝 번호인 29번을 달았다. 유난히 다른 아이들보다 성숙했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동성이 아닌 이성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큰 키에 희고 고운 얼굴, 다른 남자아이들 답지 않게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이 좋았다. 그 아이도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행복했다. 그 아이는 나에 대한 마음을 편지로 고백했는데 편지에는 문방구에서 파는 작은 목걸이도 들어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다음날 그 아이가 준 목걸이를 청남방 위에 걸고 학교에 갔다.


서로가 좋아한다는 걸 알고 나서는 모든 게 더욱 조심스러웠고, 그 아이 앞에만 가면 쑥스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 행복도 잠시, 혹시나 나의 어두운 모습을 그 아이가 알면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그 아이를 피해 다녔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하는 내게서 그 아이는 차츰 멀어져 갔다.




낮은 자존감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게 했다. 사랑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나는 사랑을 확인받기 위해 상대를 시험하는데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썼고 상대를 지치게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다음 연애에서는 상대에게 무조건 맞춰주기도 해 보았다. 나 답지 않은 억지스러운 노력들로 나 스스로를 갉아먹는 연애를 했고, 결국은 내가 지쳐 떨어져 나갔다.


사랑의 거리를 조절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다. 내 상처를 보이고 싶지 않아 너무 멀리 두면 아주 멀어져 버리거나, 너무 가까이 두면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나도 사랑할 수 있을까, 늘 의문이었지만 치열하게 사랑하고 아파하면서 내가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는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이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하는 순수한 욕망의 상태에서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인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분명해질수록 사랑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기 위해 극심한 감정 소모에 시달려야 했던 나의 20대는 지나고 보니 무척 가치 있는 시간들이었다.  


진실된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본능을 깨우고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대상이 꼭 이성이 아니더라도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이 다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해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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