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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 Apr 18. 2021

친구는 짐, 삶은 죽어가는 것

고1 담임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작은 체구에 단단하고 따듯한 목소리를 가진 김미경 선생님은 눈웃음이 참 아름다운 분이셨다. 선생님은 아침 조회 시간마다 반 아이들에게 돌아가면서 시 한 편을 읽게 하고, 시에 대한 질문을 던지셨다.  


선생님이 골라준 시집은 류시화 님이 엮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잠언 시집이었는데 첫 시는 담임선생님께서 직접 읽어 주셨다. 시를 다 읽고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 여러분에게 삶이란 무엇이고, 친구란 어떤 존재인가요?"


다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나를 지목하셨고 17살의 나는 이런 대답을 했다.


" 친구는 짐이고, 삶은 죽어가는 것이요 "


나의 대답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내 짝꿍은 나를 여태 짐으로 생각했냐며 섭섭하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암울한 대답이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내 대답을 듣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 진형이는 참 생각이 깊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의외였다.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한 비관과 약간의 삐뚤어진 반항심이 담겨있던 대답에 선생님은 오히려 나를 인정하고 공감해 주셨다. 


내가 시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시는 어떠한 긴 문장보다도 큰 울림을 주는 묵직함이 있었고, 인생을 관통하는 송곳 같은 글귀들은 얼어붙어 있던 내 삶을 깨어나게 해 주었다.


지금 내게 다시 한번 똑같은 질문은 던진다면, 나는 아마 또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 친구는 짐이고, 삶은 죽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내 대답의 의미는 예전과 다르다. 


인생이라는 거친 물살을 뚫고 지나가려면 혼자의 몸으로는 너무나 버겁다. 돌이든 짐이든 안고 가야 물에 쓸려 내려가지 않고 버틸 수 있다. 내가 지켜야 하고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 우리는 더 강해지고 아무리 힘든 상황도 버틸 수 있듯이 가족과 친구는 거친 물살에서 나를 지켜줄 짐과 같은 존재다. 그리고 죽음이 있기에 삶은 더욱 귀하고,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다고 얘기하고 싶다.


같은 대답이라도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내게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준 김미경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하며,

20년 전 선생님께서 읽어 주셨던 시를 함께 나눠보고 싶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했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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