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영웅전 #19
거실 구석에서 바느질 상자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식탁에 멍하니 앉아 미지근해진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며칠째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문제들로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입맛도 없고, 얼굴엔 말없이 내려앉은 그늘이 짙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실을 꿰고 계셨다.
몇 분쯤 지났을까.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할머니가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요즘, 네 얼굴이 참 바빠 보인다."
나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살짝 올려 보였지만, 금세 다시 굳어버렸다.
잠시 뒤, 할머니는 바느질을 멈추지 않은 채 이어서 말했다.
"바쁘고 복잡할수록, 이런 걸 해보면 좋아. 눈에 보이고, 손끝에 닿는 일. 너무 어렵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충 하면 안 되는 그런 거."
나는 실을 따라 움직이는 할머니의 손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정갈하게. 얇고 느린 손놀림은 조급한 내 마음과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흐르고 있었다.
"바느질이든 뜨개질이든 생각보다 단순한 일이야. 그런데 정성이 없으면 금방 티가 나고, 결국 다시 풀어야 하지."
할머니는 바늘을 내려놓고 천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덧붙이셨다.
"복잡한 걸 억지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손이 닿는 일 하나에만 집중해 봐."
잠시 조용해졌다. 바람이 커튼을 살짝 흔들었고, 나는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너한테 그런 일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그 질문은 깊숙이 들어왔다.
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 나는 조용히 서재로 향했다.
책장 앞에 서자 어지럽게 꽂혀 있던 책들과 그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진 상자, 사진, 메모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하는 책들이었지만, 오랫동안 방치된 채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하나씩 꺼내고, 먼지를 털고, 분류하고, 천천히 책의 높이들을 맞춰나갔다.
책장 속 질서가 제자리를 찾아가자, 내 안의 혼란도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할머니께 복잡한 마음일수록 손끝에 닿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