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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잘 놀아야 잘 큰다는 데 과연 ‘잘’이란?

by 빛숨 김광화

지난 글에서는 어른이 아이와 ‘마주이야기’를 통해 많은 걸 배운다고 했다. 아이는 어른보다 맑고 꾸밈이 없는 데다가 사랑 그 자체가 아닌가. 아이는 부모 사랑으로 태어났으니 존재 자체가 사랑이다. 아이가 우리 곁에 온 이유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사랑만은 공통이 아닐까 싶다.


아이한테 어른이 배우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무궁무진한 세상이 열린다. 하여, ‘놀이’를 주제로 몇 회에 걸쳐 다룰까 한다. 아이는 어른보다 잘 놀고, 많이 논다. 특히 요즘 아이들 놀이는 내가 자랄 때랑 매우 다르더라. 우리 자랄 때는 제기차기든, 고무줄놀이든 한 가지 놀이만으로도 몇 시간을 놀곤 했다. 또한 몸으로 하는 놀이나 자연을 벗 삼는 놀이가 많았다. 공조차 아주 귀했다. 연이나 팽이 역시 손수 만들며 놀았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얼마나 놀 게 많은가! 아이는 드문데, 공 같은 놀이 도구는 차고 넘친다. 돈 주고 산 연을 한두 번 날리고 나면 금방 심드렁하다. 놀이터와 놀이동산은 또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스마트 폰으로 빠져들면 헤쳐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놀거리들이 널렸다. 심지어 삶을 망가뜨리는 놀이조차 드물지 않은 세상이다. 과연 잘 논다는 게 무얼까? 어떻게 놀아야 할까?


세상이 빠르게 바뀔수록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해지는 법. 방향이 잘못되면 빠른 속도는 그만큼 더 치명적일 수밖에. 올바른 방향을 잡기 위해서라도 놀이를 그 근본에서 다시 짚어보아야 하리. 사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놀이’란 그저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뜻 정도로 알았다. 거기에 따르면 ‘일정한 규칙 또는 방법에 따라 노는 일’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이 ‘논다’라는 말에는 보통 ‘재미’라는 내용도 같이 따라붙는다. 근데 내가 요즘 아이들과 함께 놀아볼수록 놀이가 가진 그 뜻이 그리 단순하지 않더라.


처음으로 내가 도시 아이들을 데리고, 산골 캠프를 꾸릴 때만 해도 내 관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가 안전이요, 그다음이 재미였다. 재미가 중심이라면 놀이가 자극적일수록 또 아이들이 많을수록 그러리라. 하지만 그 뒷감당 역시 같은 무게로 따르는 법. 노는 과정에서 예상과 달리, 온갖 사건이 펼쳐질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보험을 든다고 될까? 진정한 보험은 자기 안전을 스스로 지키는 ‘자기보험’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첫 캠프로는 아이 두 명이 딱 좋았다. 솔직히 사람이 적더라도 안전을 장담하기는 늘 어렵지만 말이다.


<몸이 먼저 알아서>

그런 마음으로 처음 캠프를 했던 지난날로 잠시 돌아가 보자. 여름이면 가장 흔한 놀이가 물놀이. 우리 사는 곳이 산골이라, 계곡을 먼저 찾는다. 우리 집 가까운 계곡은 폭이 대략 5미터 남짓. 물은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쉼 없이 흐르는 편이다. 다만 이 ‘자연 놀이터’는 편리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이 만든 ‘편의 시설’이라곤 그 어떤 것도 없다. 재미나 설렘보다 긴장이 먼저랄까. 불편함이 놀이가 되는, 그런 묘한 곳이다!


당시 일 학년이던 ‘웃꿀’은 이 계곡으로 그 이전에도 몇 번 와봤기에 조금 익숙하다. 반면에 이 학년 ‘갓남’은 처음이다. 계곡이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은 흥분한다. 달린다. 근데 막상 들머리에 오자, 갓남이 주춤한다. 눈빛이 다르다. ‘어라, 이게 뭐지?’ 갖은 편의 시설과 놀이 장치가 잘 되어있는, 워터파크 같은 물놀이 시설에 익숙한 아이에겐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거 같으리라.


눈앞에 보이는 거라고는 멋대로 자라는 나무, 우락부락 바위. 계곡 아래로 접어드는 그곳에는 길조차 없다. 심지어 갈대 비슷한 달뿌리풀이라는 큰 풀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자신을 반기기는 고사하고, 마치 여러 수문장(守門將)이 떡 버티며 외치는 거 같다.

“잠깐! 거기 서! 너희, 왜 왔니?”


아이가 이곳으로 올 때 가졌던 흥분이 어느새 착 가라앉는다. 둘레를 살필 수밖에 없다. 우리를 막는 건 이 풀만이 아니다. 이 풀을 휘감고 있는 풀이 또 있으니 바로 환삼덩굴. 얼핏 봐서는 그렇고 그런 덩굴풀이다. 근데 그 풀의 눈높이로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풀은 줄기와 잎 곳곳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여, 무심코 곁을 스치듯 지나다가는 살갗이 긁힌다. 내가 앞장서, 낫으로 이 풀을 베면서 길을 내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계곡에는 반가운 물이 흐르지만, 아직 즐기기에는 이르다. 그곳에는 본래 주인이 또 있기 마련. 물고기, 다슬기, 개구리가 있다. 먹이사슬에 따라 뱀도 어딘가에 있기 마련. 독이 없는 뱀이야 사람을 보면 도망가지만, 독을 지닌 독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 독을 믿기에 똬리를 틀고, 주인 행세를 단단히 한다. 사고는 순간에 일어나기 마련.


흐르는 물이 가까워져 오자, 솔직히 나는 살짝 걱정된다. ‘얘들아, 조심해!’라는 말을 하려고 아이들을 보자, 갓남이는 조금 전과 또 다르다. 눈은 더 빛나고, 무릎을 굽혀, 몸을 조금 낮추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누가 알려줘서 되는 몸짓이 아니다. 사실 이 ‘조심’이란 말은 또 얼마나 막연한가! ‘미끄러진다. 넘어진다. 찔린다. 긁힌다. 베인다, 뱀한테 물린다….’ 이 모든 걸 조심해야 하는데 어찌 이를 말로 다 할 수가 있을까. 그렇게 말로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 잔소리를 싫어한다. 손수 겪어서, 몸으로 알아가는 지혜는 또 얼마나 많은가?


야생에서는 지식보다 감각이 먼저다. 독사가 사람을 발견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독사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이게 안 되어있다면 잠자던 감각을 깨워야 한다. 나는 이를 ‘반사 조심’이라고 부른다. 남이 뭐라 하기 전에 스스로 먼저 조심하는 것을 뜻한다. 두려움을 스스로 이겨내는 힘이다. 이럴 때는 누군가 곁에서 ‘조심하라’는 말조차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낯선 곳에서는 잘 난 척하기보다 겸손이 먼저다. 자신을 낮추는 만큼 안전하다. 자신감을 키우는 바탕이랄까.

낯선 계곡에서 몸을 낮추고_줄임.JPG 계곡 탐험은 주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자신이 적응하는 만큼 앞으로 나아간다. 물때가 끼어, 미끄러운 바위를 지날 때면 아이들은 거의 앉은뱅이걸음으로 간다. 그래도 위험하다 싶은 곳은 아예 네발로 기면서 간다. 그게 더 안전하다는 걸 몸이 안다.


그렇게 계곡을 탐험하면서 우리는 아주 많은 걸 하며 놀았다. 엉성하나마 댐을 만들기도 하고, 적당한 바위 위에는 돌탑을 쌓기도 하며, 다 쌓은 다음에는 다시 그 탑을 적당한 거리에서 작은 돌멩이로 던져, 무너뜨리는 놀이도 했다. 달뿌리풀로는 물레방아를 만들고, 왕관도 만들었다.


이쯤에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놀이가 뭘까?’ 이제는 앞에서 들었던 정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노는 일’에서 ‘일정한 규칙’이 좀 답답하다. 이 계곡에서 아이들은 물이 있으니, 물로 놀고, 돌이 있으니, 돌로 논다. 풀이 있으니, 풀로도 논다. ‘규칙’ 그런 거에 매이지 않는다. 환경에 맞추어 놀고, 가끔 새로운 놀이도 스스로 만들어내더라. 아이들 처지에서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또 탐험하는 모든 활동이 다 놀이기도 하다. 몸을 낮추고 둘레를 살피는 것도 놀이요, 네발로 기는 것 역시 놀이지 않은가. 무궁무진 자연 놀이에서 굳이 규칙을 들자면 ‘살아남기’가 아닐까. 그럼, ‘놀이란 살아남고자, 노는 일’ 이렇게 넓게 정의를 내려도 되리라.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다. 놀이는 생존, 곧 ‘살아남기’와 뗄 수 없다. 살아남자면 우선 먼저 안전해야 한다. 재미는 그다음이다. 그저 재미에만 빠져, 둘레를 소홀하여 독사한테 물린다면 목숨조차 위태롭다.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면 어디를 얼마나 다칠지 알 수가 없다. 환삼덩굴에 긁히면 따갑다.


하지만 어려운 문을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우리는 즐거움을 느낀다. 낯선 환경을 조금씩 내 세상으로 만드는 과정. 그 과정에서 몸 안에 잠자던 반사 신경이 ‘반사 조심’을 거치면서 조금씩 깨어난다. 이때는 ‘재미’보다 더 값진 ‘기쁨이나 뿌듯함’이 밀려온다. 재미는 잠깐이고, 기쁨이나 뿌듯함은 오래간다. 재미는 밖에서 온다면, 기쁨은 안에서 솟는다. 재미가 밥이라면 기쁨은 그 밥을 잘 소화한 영양소다. 이는 곧 삶의 활력소가 된다.

환삼덩굴에 긁히면서 상처받지 않는 관계를 배우고, 달뿌리풀 줄기에 걸리면서 물가 식물의 독특한 생존 방식에 대해 배운다. 손수 다슬기를 잡아, 된장국을 끓이면 한결 맛나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렇게 ‘살아남기’는 그야말로 크고 작은 즐거움과 맞닿아있다.


이렇게 ‘살아남기’가 잘 될수록 차츰 여유도 늘어난다. 낯선 환경에 조금씩 익숙해지면, 이제 우리는 그 환경을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자연스럽게 놀이 단계가 올라간다. 물레방아를 어떻게 만들면 더 잘 돌까를 탐구하는 건 과학 놀이요, 왕관을 만들면서 더 우아하게 만드는 건 예술 활동이라 하겠다. 납작한 돌멩이로 물수제비를 뜨는 건 처음에는 쉽지 않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과학 원리를 탐구하고, 다양한 몸짓으로 던져보면서 잠자던 자기만의 운동 신경을 깨운다.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쓰면서 근력도 키운다. 가속도로 던져야 하는 순간 동작을 되풀이하면서 민첩성도 키운다. 이렇게 자연 놀이터는 자신이 다가간 만큼, 그 비밀의 문을 열어준다.


돌탑 쌓기도 아주 흥미롭다. 레고 쌓기 놀이와는 매우 다르다. 자기 머릿속으로 그린 그림을 제 눈앞으로 드러내는 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설계부터 달라진다. 계곡에 있는 모든 돌은 그 어떤 돌도 같은 게 없다. 어떤 돌을 선택할까? 다 자기 판단이요, 자기 몫이다. 아랫돌일수록 납작하고, 넓은 돌이 좋다는 걸 쌓으면서 알아간다. 그 크기는 또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크기로 한다.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돌 크기에 맞추어, 또 돌 모양에 맞추어 쌓아 간다. 때로는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가 전체를 지켜준다는 것도 배운다. 순간마다 머리를 쓰고, 마음을 다스리며….


아이 돌탑.jpg

(공들여 쌓고 또 기꺼이 무너뜨리는 돌탑)


완성이란 기준도 딱히 정해진 게 없다. 그저 자신이 그리는 탑을 쌓으면 된다. 쌓아가면서 기준이 또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이….


그렇게 공들여 쌓은 탑을 아이들은 기꺼이 또다시 무너뜨리더라. 내 것에 집착하지 않고, 지난 성과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도 아이들에게 배울 점이라 하겠다. 언제든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여!


당시 우리는 계곡에서 이렇게 여러 놀이를 하고도 짬을 내어, 덕유산 넓은 계곡으로 가서, 제법 깊은 물에서 물놀이도 실컷 했다. 밤에는 마당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캠프가 끝나고 아이들 소감을 물었다. 그랬더니 다 좋았단다.

“가장 좋았던 거 하나만 말해봐”

“저는 계곡 탐험이요. 다음에 또 하고 싶어요”

“저는 텐트 치고, 밤에 별 보고 잔 거예요.”


나로서는 아이들 덕에 놀이 그 자체를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놀이 세계는 알면 알수록 어마어마하더라. 잘 놀아야 잘 큰다는 말이 얼마나 깊은 뜻이 있는지…. ‘잘’, 그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거 같다. 아이마다 가진 개성을 제대로 살려내려면 놀이에 대한 상식을 뛰어넘고, 뇌과학하고도 자연스레 만나게 되더라. 그리하여 맞춤형 놀이, 창조 놀이로 다가가야 하리…. 놀이, 그 뿌리를 찾는 이야기는 다음 회에 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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