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 따라 미국 가는 남편 2-16
미국 비자 발급은 우리 가족의 이주 준비 속도를 확 끌어올렸다. 그전까지는 괜히 이렇게 집을 부치고 물건을 줄이고 있는데,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면서 이것저것 미루고 있었는데, 비자가 나온 시점부터는 진짜 빠르게 이주 준비를 해야 했다. 실제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학교를 조금 더 빠르게 확정 짓고, 빠르게 서류 작업을 진행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학교 오퍼를 받아들인 시점은 학교에서 요구한 데드라인에 근접해서였는데, 그러다 보니 여러 서류 작업의 시간이 걸리고 비자를 받는 시점도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어쩌면 아내의 평생 커리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학교 선택이었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살아야 하는 지역에 대한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 보자면, 우리 가족이 선택한 이 학교와 이 지역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고백한다) 어쨌든 비자 스티커가 붙은 여권을 받아 든 현시점은 출국을 불과 2주 남긴 시점이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 우리의 이삿짐은 소포박스 6개로 마무리했다. 그 안에는 수많은 가정용 잡화와 겨울옷, 그리고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생활필수품들이 들어갔다. 50권도 되지 않는 아이와 나와 아내의 한국어 책들도 들어갔다. 그렇게 20kg 분량의 박스 6개를 보냈음에도 집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작 21평 남짓의 아파트 안에는 아직도 수많은 짐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단 우리가 집을 빼는 날짜는 출국 하루 전이다. 따라서 출국 하루 전까지 이 집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니, 정말 마지막까지 써야 할 것들까지 처분할 수는 없었다. 원래 이렇게 출국하기 전까지 다 이렇게 짊어지고 있다가 가나 싶었다. 하지만 뭐 다른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 땅에 의지할 만한 사람, 장소 하나 없는 우리 가족은 정말 마지막까지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보낸 소포 박스 6개를 제외하고 우리가 미국에 들고 갈 수 있는 짐의 양은 50파운드 가방 6개 플러스 기내용 캐리어 3개, 거기에 손가방 3개까지다. 무게로는 총 200kg 정도 되었다. 또다시 짐을 솎아낸다. 가져갈 것, 버릴 것, 팔 것. 남들은 친정이나 본가, 친척 집에 짐을 맡기기도 한단다. 아무래도 유학을 한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니까. 하지만 우리의 선택지에는 없다. 지금의 마음으로는 다시 돌아올 마음도 없거니와, 그때까지 보관해 줄 사람도 없다. 즉, 가져가거나 처분하거나, 둘 중 하나다.
크기가 큰 것은 모두 처분 대상이다. 가구는 물론, 수많은 생활 가전은 모두 처분해야 한다. 많이 크지 않아도 전열 가전은 모두 처분하고 새로 구매해야 한다. 최근 다른 가전제품들은 110 볼트와 220 볼트를 겸용으로 쓸 수 있는 제품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전열 가전은 다르다. 온수 매트나 전열매트, 전기장판, 드라이, 고데기와 같은 헤어 가전, 밥솥과 같은 조리 가전 등은 모두 가져가는 물건에서 제외된다. 그렇게 처분한 밥솥만 두 번째다. 미국에서 산 밥솥을 처분하고 한국에 왔었고, 같은 제품의 220 볼트 제품을 이번에 또 처분해야 한다. 드라이기, 고데기 이런 헤어 제품은 비싼 건 아니더라도 다시 사는 건 늘 아깝다. 그래도 그런 몇몇 제품 때문에 변압기를 쓸 수도 없다. 지금이 무슨 90년대도 아니고.
12년을 쓴 나의 개인 피씨 아이맥은 이번에 처분 대상에 포함되었다. 대학원 시절 구매해서 수많은 실습 작품을 작업하는 데 사용하고, 회사에 와서도 재택 ‘야근’ 할 때 업무 기기였다. 마지막엔 아이의 숙제와 학원 과제, 그리고 비대면 예배까지 책임져 줬던,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하지만 우리의 여정은 여기까지다. 일단 무게가 너무 무겁고, 더 이상 이동이 불가능한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얼마 전 구매한 최저가 맥북이 이 아이맥보다 성능이 좋다. 모니터로라도 사용하고 싶은데, 그렇게는 사용이 안 된다.
취미용으로 구매한 기타도 모두 처분하게 됐다. 마지막까지 어쿠스틱 기타 하나는 가지고 가고 싶었는데, 가족 세 명이 가방 12개를 챙겨야 하는 극한의 ‘이동 작전’에 기타가 웬 말인가 싶었다. 큰맘 먹고 산 전자기타와 딸아이를 위해 구매했던 어쿠스틱 기타, 그리고 그 외의 취미 용품은 모두 처분 대상이다.
아까운 것이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이주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수년은 더 쓸 물건들을 팔고, 또 버려야 했으니까. 10년 못 되는 우리의 한국생활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물건들도 많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인터넷에서 구매했던 10만 원 남짓의 옷장이나, 미국에서 쓰던 이케아 침대 프레임을 못 잊어 한국에 이케아가 들어오자마자 구매했던 부부의 침대 프레임, 그리고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고 나서 과감하게 구매했던 브랜드 에어컨, 세탁기,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중소 브랜드로 구매한 TV와 냉장고 등, 아까운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조차 많지 않았다. 고작 두 주만에 이 많은 것들을 다 처분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방법을 떠올렸다. 첫째로 모두 제값을 받고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값을 받으려면 시간을 두고 당근 마켓에 올리고 기다려야 하는데, 이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근마켓에 올라와 있는 물건의 적정 가격보다 더 싸게 올리고 쭉 팔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는 물건은 과감하게 버렸다. 개인적으로도 아깝고 지구에게도 미안하지만, 싸 짊어지고 갈 수가 없다.
둘째로 대형 가전을 중고 마켓을 통해 개인에게 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TV 등은 고가를 주고 산 제품이지만, 그렇다고 고성능 제품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엔트리 급 모델을 팔면서 개인에게 팔려다 보면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배송이나 운반 등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중고 제품을 사들이는 중고 가전 매장에 연락해서 팔기로 했다. 물론 가격은 완전 X값이다. 하지만 기간이 짧기 때문에 확실하게 판매가 보장되는 방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여러 업체에 전화해서 물건 사진, 시리얼 넘버 등을 보냈고, 그중에서 가장 많은 금액을 부르는 업체에 팔기로 했다. 직접 와서 가져가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에 이 쪽이 훨씬 편리했다. 물론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금액보다는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셋째로, 정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버렸다. 이 부분은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미국에 와서 후회가 많았으니까. 정말 꼭 필요한 물건이 뭔지 잘 모르는 것이 가장 패착이었다. 생각보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필요한 물건과 미국에서 직접 느끼는 필요한 물건의 차이가 크다. 매일매일 생활하면서 그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던 생활필수품들은 다 손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잘 챙기지 않게 된다. 하지만 당장 미국에 도착해서 생활하면 가장 많이 불편함을 느끼는 물건들이 바로 그런 물건들이다. 오랜 기간 동안 늘어난 주방 살림살이나, 욕실 용품들이 그렇다. 반면 너무나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물건들은 여전히 창고에 있는 물건들도 있다. 그렇게 아쉬운 물건들이 많다.
한편으로는 당연히 아쉬운 물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200kg이라는 양의 물건은 생각보다 적은 양이기 때문이다. 지금 아쉬워하는 그 물건을 챙겨 왔어도, 그 때문에 다른 물건을 못 챙겼을 것이고, 그럼 또 그 물건 때문에 아쉬웠을 것이다. 그저 짧은 시간 안에 물건을 분류하고, 처분하고, 챙기는 것을 다 해냈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할 뿐이다.
약 두 주 동안 쓰레기장을 하루에 열 번씩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버린 물건이 산더미다. 10년 전 한국에 올 때는 이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땐 고작 결혼 1년 차 때여서 그랬던 듯하다. 하지만, 10년을 살았으니. 당연히 버릴 것이 많다. 나름 10년 동안 다시 돌아갈 날을 꿈꾸며 살았기에 짐을 많이 늘이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은 물욕이 정말 많구나 싶었다.
그렇게 이사 나가기 전날에 이르고, 마침내 21평 아파트를 텅 비울 수 있었다.
Photo by Yaro Felix Mayans Verfurth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