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바람

엄마의 바람

by 윤혜경

*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고(사진출처 : Daum)


*단풍나무 길(출처: 꽃나무 애기 Band)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출처: Daum)



누나네 엄마는 고등학교 때 반 친구들 몇몇이 졸업 후 우여곡절 끝에 거의 40여 년 만에 만났다. 안부들을 물으며 만남을 이어온 지 2년 되었다.

그중 명예퇴직을 앞둔 친구의 제안으로, 밤이면 별이 내려온다는 친구의 평창 별장에서 1박 2일 일정의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여기는 우리가 있으니까.... 랄프 걱정은 하지 말고, 가서 아픈 머리 좀 식히고 와~."

이미 평창 바람이 든 누나 엄마는 누나 아빠의 권유로 못 이긴 척, 친구 차에 동승했다.


여행은 엉킨 누나 엄마의 머리를 시원한 바람으로 정갈하게 씻어냈다. 풀숲이 아무렇게나 바람에 흔들리는 숲 속을 걸으며 구운 감자를 먹고, 삶은 옥수수를 먹었다. 어둠에 싸인 시골에서 별이 가득 박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은 어지러웠다. 반짝거리는 작은 다이아몬드 같은 별들이 끊임없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착각에 누나네 엄마와 친구들은 멀미가 차올랐다.

휘청거림을 수습하고 돌아온 숙소에서, 한 친구가 핸드폰으로 잔잔한 음악을 켰다.

그리고 함께 '긴 밤 지새우고~'와 '한계령'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밤하늘에서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금빛 별과 바삭거리는 바람 소리는 보너스였다.


누나네 엄마는 한적하고 아늑한 동네의 시골 별장에서 친구들의 살아온 이야기에 쏙 빠져서 랄프 안부 전화조차 까맣게 잊었다.

친구들이 구워주는 송이버섯과 고기를 먹고, 친구들이 구해온 맛깔난 밑반찬과 달콤한 간식을 즐긴 누나네 엄마는 특기인 '바삭 누룽지'를 만들어서 간식으로 제공했다.


엄마는 아픈 랄프를 가족에게 맡긴 채 집을 떠날 때는 무거운 마음이었다가 강원도 평창 밤하늘의 보석 같은 별을 쳐다보느라 마음속의 염려 나비들이 시냇물 흐르듯 떠내려갔나 보다.

고등학교 친구의 별장에서 개성 강하던 선생님들의 추억을 끄집어내었다. 교문 앞에서 30cm 자를 들고 여학생들의 머리 길이를 귀밑 2cm가 넘는 지를 도끼눈으로 확인하던 학생주임 선생님, 시를 너무 감정 잡고 읊으시던 시인 국어 1 선생님, 억 시 노프 스토리에 딱 어울리던 젠틀맨 영어 선생님, 고전 읽기를 강조하시던 국어 2 선생님, 테니스를 열심히 가르쳐주신 체육 선생님, 카로 미오 벤(내 사랑 그대)을 알려주신 음악 선생님...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무서운 선생님의 눈을 피해 끊임없이 일탈을 꿈꾸던 여고시절의 기억들을 병풍 펼치듯 늘어놓고 깔깔대느라...


날아가는 웃음과 더불어 몸도 가벼워졌다.

세상에, 암 투병 중인 랄프의 고통을 까맣게 잊고.


*랄프가 누나네 가족을 지켜주었듯이 5년째 거실을 지켜준, 창가 식탁 위의 '카틀레아'



'결혼의 의미, 자녀 양육, 가족 관계, 노후의 생활, 이별... 내가 내 삶을 살아오긴 한 건가?'


온통 남편과 자식 그리고 가족 친지의 행사들로 둘러싸여 정작 자신들을 위한 시간은 언뜻언뜻 구름 사이로 내다보는 별처럼 나타나다 사라지다를 반복했던...


엄마와 친구들은 모처럼 자신들이 걸은 길을 하늘에 길게 펼쳐보며 상념에 잠겼다.

늦은 밤까지 찬물 세수로 버티며 공부를 하고, 입시를 치르고, 시장에도 여고 교복을 입은 채 간다는 우스갯소리처럼 교복이 보여주는 명문고 자부심을 가슴에 품었던 시절,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에 운 좋게 대학을 들어가고, 서클활동을 하고, 하계 봉사를 가고, 조국순례대행진에 참여하고, 졸업 후 직장을 정하고...


결혼 그리고 오래 쌓아 올린 자신의 발자취는 남편과 자식들 삶의 책갈피가 되고 만 시간들...

60 나이를 가까이 둔 여고동창들은 별이 쏟아져 내리는 평창의 밤바람을 쐬며, 야식으로 군고구마가 구워지는 바비큐판 주위에 둘러앉아 결혼이 첫 번째 고비, 임신 출산이 두 번째 고비, 아이들 진학 일정이 세 번째 고비,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아 두었던 많은 생각들을 꺼내서 처음으로 탈탈 털어 정리했다.

지나온 발자국은 '안주(安住) 반, 핑계 반'의 지난 시간들을 펼쳐 보여주고, 그녀들은 별이 빛나는 밤에 마음을 씻어내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기억해 냈다.

Killara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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