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문장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기로 했다
세상에는 3000개에서 4000개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한다. 각 언어에 속한 방언까지 합치면 6000개에서 7000개까지 늘어난다. 놀라운 숫자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이 있다. 그것은 수많은 언어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점이다. 분명 이 언어들은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사용했다. 이들은 서로 만나 인간에게 필요한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함께 논의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이 수많은 언어사이에는 공통점들이 있다. 이것은 거의 신기에 가까운 일이다.
그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단어마다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언어마다 글자가 있다. 글자가 모이면 단어가 된다. 그리고 단어가 모이면 문장이 된다. 이때 단어를 모아서 문장으로 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단어에 역할을 정하는 것이다.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된 역할이 우리가 다 아는 주어역할, 동사역할, 목적어 역할이다.
영어와 한국어도 1797년까지 역사 속에서 충돌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영어에도 한국어에도 문장 속에서 주어역할, 목적어 역할, 그리고 동사 역할을 하는 단어가 있다. 이러한 기이한 공통점만 있다면, 글자와 소리가 달라도 한국말만 하던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는데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영어와 한국어은 전혀 다른 언어이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단어의 역할을 정하는 방법에 있다. 영어와 한국어는 단어마다 주어, 동사. 목적어라는 역할을 정하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단어의 역할을 정하는 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단어의 형태에 역할을 정해 놓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문장에 단어가 놓인 자리에 역할을 정해 놓는 방법이다.
한국어는 단어의 형태에 역할을 정해 놓았다. 단어가 문장 속으로 들어가기 전, 문장 밖에서 미미 단어의 형태를 변화시켜서 역할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단어에 변화를 줄 때 규칙을 정하게 된다. 먼저, 단어의 종류(품사)를 정한다. 다음으로, 종류에 따라서 단어 끝에 각기 다른 변화를 주는 것이다.
단어가 명사면, 단어 끝에 조사를 붙이면 된다. 명사에 주어 조사 '이, 가'가 붙으면, 그때부터 명사는 주어가 된다: 준우가. 명사에 목적어 조사 '을, 를'이 붙으면, 그때부터 목적어가 되는 것이다: 우유를.
동사는 아예 단어 끝이 '다'로 끝난다: 마신다. 명사와는 달리 동사의 끝부분이 시제나 존칭이나 부정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하게 굴절하는 것이 특징이다: 마셨다(과거), 마시세요(존대), 마시지 않았다 (부정)
한국어는 문장에 단어가 나열되는 순서에는 그다지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미 단어의 형태만으로도 의미를 생성하는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국어도 표준어순이 SOV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다: 준우가 우유를 마신다. 그러나 단어 순서가 바뀌어도 문장이 동사로 끝나기만 하면 한 문장이 구성이 된다: 우유를 준우가 마신다. 문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동사가 울타리 문을 닫는 역할을 해주면 그것이 전부이다.
심지어 동사로 한 문장을 끝내고 그 문장의 주어 목적어가 문장 밖에 삐져나오더라도 도치문으로 성립된다: 마신다. 준우가 우유를. 한발 더 나아가 상황에 따라서 주어는 좀 빠져도, 때에 따라서 목적어가 빠져도, 큰 무리가 없다: 우유를 마신다. 준우가 마신다.
한국어와는 아예 뿌리가 다른 영어에는 기원이 되는 언어가 있다. 기원전 4000여 년 즈음 형성된 인도유럽어이다. 이 인도유럽어 역시 단어의 형태에 역할을 정해 놓고 사용하였다. 마찬가지로 단어가 문장 속으로 들어가기 전, 문장 밖에서 미리 단어의 형태로 역할을 정해 놓는 것이다.
단지 한국어와 단어 형태에 역할을 정하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 한국어처럼 모든 단어에 품사가 정해져 있는 것은 같다. 그러나 한국어 명사처럼 조사를 붙였다 뗐다하는 방법은 없다. 오히려 한국어 동사의 어미를 변화시키는 방법에 더 가깝니다. 단어 앞 뿌리 부분은 그대로 두고 끝만 변화시키는 규칙이었다. 각 품사마다 다른 변화규칙을 적용한다. 이것이 초강력 굴절의 규칙이 있었다.
단어의 굴절 변화의 원조는 인도유럽어족의 아버지라고 추정되는 언어는 산스크리어 (이하 범어)에서 보인다. 범어의 굴절변화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복잡하다.
예를 들어 명사는 8가지 역할을 할 수 있는 형태로 굴절을 한다. 이 8가지 역할은 또다시 쌍수(두 사람일 때)와 복수(세 사람 이상일 때)의 형태로 다시 한번 굴절한다. 이 전통에서는 '두 사람'이란 상황이 중요해서 따로 쌍수의 형태로 만들어 쓰고 있다. 따라서 명사는 모두 24개로 변한다. 예를 들어 명사 nṛpaḥ의 굴절표를 한번 그림처럼 구경만 해보자. 공작새의 화려한 꼬리처럼 현란한 것 맞다. 직접 소리를 내 보면 더 그러하다.
만약에 '한 분의 왕이'라고 쓰고 싶으면, nṛpaḥ 를 주어이면서 단수형으로 만들어 쓰면 된다: nṛpaḥ
범어동사는 10개의 시제가 있다. 한 시제마다 3개의 인칭과 3개의 수로 굴절한다. 따라서 한 시제마다 9개의 굴절된 단어가 생성된다. 예를 들어 agam(갔다)는 과거시제 동사이다. 이것을 표로 한눈에 보면 다음과 같다.
만약에 '한 분의 왕이 갔다'라고 하고 싶으면, 한 분의 왕이 삼인칭 단수니까 agam을 삼인칭 단수형을 만들어서 써야 한다: nṛpaḥ agacchatㅣ
따라서 범어도 문장 내 질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주어동사만 있는 문장도 동사주어로 나열해도 된다. 심지어 한국어처럼 문장이 반드시 동사로 끝나야 한다는 규칙도 없다
nṛpaḥ agacchatㅣ
agacchat nṛpaḥㅣ
실제로 범어로 된 고문을 보면 단어의 순서가 마구 섞어있다. 판독의 첫 번째 작업은 단어마다 끝부분을 보고 역할, 품사, 수, 그리고 뜻을 분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명사들과 끝이 일치하는 관사, 동사, 형용사 등을 찾아서 묶는다. 이것으로 단어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면 문장의 전체의미는 쉽게 드러난다. 이 과정은 마치 언어게임 같다.
고대영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조상들의 굴절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범어와 마찬가지로 단어의 형태로 역할을 미리 정해놓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범어처럼 단어마다 품사가 정해져 있었고, 또한 품사마다 굴절의 규칙 역시 정해져 있었다.
단지 범어와는 달리 많이 간략해졌다. 명사의 경우 단어의 역할도 4가지로 줄어들었고, 수도 쌍수가 빠지고 단수와 복수만 남았다. 명사는 모두 8개로 굴절한다. 예를 들어 dweorg(난쟁이), hund(개), stān(돌)의 굴절표를 한번 구경해 보자. 화려한 꼬리의 공작새 같은 범어에서 색이 빠진 소박한 공작새 같다고나 할까?
만약에 '한 난쟁이가 '라고 쓰고 싶으면, dweorg를 주어이면서 단수형으로 만들면 되고: dweorh, '개 한 마리에게 '라고 쓰고 싶으면, hund를 ~에게 단수형으로 만들면 되고: hunde, '돌 하나를'이라고 쓰고 싶으면, stān를 목적어이면서 단수형으로 만들면 된다: stān.
고대영어 동사도 범어와는 달리 쌍수가 없고, 단수 복수만 있어서 시제 하나당 모두 6개로 변한다. 예를 들어 ġeaf는 과거동사는 다음과 같이 굴절한다. 확실히 색 빠진 공작새 맞다.
만약에 '한 난쟁이가 개 한 마리에게 돌 한 개를 줬다'라고 하고 싶으면, 주어인 dweorh에 맞추어 ġeaf를 삼인칭 단수로 만들면 된다:Dweorh ġeaf hunde stān.
정관사(Se, þǣm, þone)와 함께 문장을 완성하면 이런 모양이 된다.
Se dweorh ġeaf þǣm hunde þone stān.
The dwarf gives the dog the stone.
그런데 고대 영어에서는 개 þǣm hunde (the dog)와 돌 þone stān (the stone)을 바뀌어 써도 무방했다.
Se dweorh ġeaf þone stān þǣm hunde.
The dwarf gives the stone the dog.
고대영어도 범어같이 문장 속에서 단어를 나열하는 순서는 유연했던 것이다. 주절은 대체로 SVO의 순서를 유지하였고, 종속절에서는 한국어처럼 SOV도 썼으며, 심지어 시 같은 작품에서는 운율을 맞추기 위해 VSO도 썼다고 한다. 따라서 문장 내 질서에 있어서는 고대영어가 한국어와 더 비슷했다.
중세영어를 지나 15세기를 거치면서 조상들이 물려준 뿌리 깊은 언어습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단어의 굴절된 끝부분이 탈락되기 시작했다. 명사나 동사를 포함한 주요 품사들은 뿌리만 남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고대명사 dweorg(난쟁이)는 뿌리인 dweorg만 남았고, 고대명사 hund(개)는 역시 중세명사 hound로 바뀌면서 뿌리인 hund만 남았고, 고대명사 stān(돌)은 중세명사 ston으로 바뀌었고, 역시 굴절된 끝부분이 다 탈락하고 뿌리인 ston이 남았다. 고대동사의 과거 ġeaf형도 중세동사 gaf로 변하였으나, 역시 굴절된 끝부분이 다 떨어져 나가고 뿌리인 gaf만 남았다. 마치 꼬리 없는 어미 공작새 모양이 되었다.
그렇다. 모두 끝부분이 날아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으나, 2가지만 말하면, 1) 끝부분을 정확하게 발음하기가 귀찮아졌다는 설이다. 실제 상황에서 dweorh와 dweorhe를 끝까지 정확히 발음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어지지 않았을까? 2) 고대영어에도 to나 of 같은 전치사가 따로 있었다. '~에서' 나 '~의'로 굴절된 단어를 쓰느니 차라리 전치사를 쓰는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설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끝부분의 탈락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1) 이제는 단어형태로 역할을 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2) 이제는 문장 밖에서 미리 단어의 역할을 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단어의 형태는 규칙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었다. 똑같이 생긴 단어로 여러 가지 역할들을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무엇으로 dweorg, hund, ston를 주어로, 목적어로, 전치사의 의미를 가진 명사로 구분하여 전달할 수 있겠는가? 단어형태를 가능한 변화시키지 않고도 역할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 문장 밖에서 역할을 정할 필요가 방법! 자연스럽게 문장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변화를 선택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문장 속으로 새로운 질서를 탐색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문장 속으로 탐색의 길을 떠난 영어! 여기서부터 영어는 한국어와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우리가 가 보지 못한 길로 들어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어 형태가 정확성이나 예측성을 줄 수 있다는 기대는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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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