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기억에 대하여

by 낮별

남편과 나란히 소파를 등지고 앉아 야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남편의 중, 고등 친구이자 내 대학친구인 Y가 전화를 걸어왔다. 물론 남편의 전화기였다. 예전엔 나와도 제법 친했는데 그 친구로 인해 우리 부부가 만나 결혼한 이후 내게 따로 연락할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남편에게 하는 연락이다. 즉, 한때는 내 친구였는데 이제 남편의 친구가 되었다는 말이다.


남편이 일 때문에 Y의 선배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인데 남편이 모르는 선배인 걸 보면 초등학교 선배인가 보다 생각하며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때 Y가 말했다. "야, 니 와이프 선배인데 니 와이프한테 소개해달라고 해."


아, 대학선배였구나. 나는 이름이 뭐냐고 물었고, Y는 그 선배의 이름을 말했다. 이름 세 글자를 듣고 난 내 반응은 "처음 듣는 이름이야. 난 모르는 사람이야." 정말로 낯선 이름이었다.

"야, 네가 그 선배를 왜 몰라?"

순간,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을 모르는 건가 싶어 3초쯤 멍해졌다.

곧 Y는 내게 그 선배라는 사람의 사진을 카톡으로 전송해 왔다. 얼굴을 봐도 모르겠냐며.

사진을 봤는데 진짜 난생 초면의 중년 아저씨가 있었다.

이십 대 초반 사진을 봐도 기억이 날까 말까 한 것을 50이 넘은 얼굴로 어찌 기억해 내리.


그다음 날 아침 혼자 걷다가, 불현듯 어제 들은 그 이름이 생각났고, 이름 두 글자에 '선배'라는 호칭을 붙여 말해보니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확 엄습해 왔다. '아는 사람'이라는 확신. 아니 '알았던 사람'이라는 확신.

언젠가 **선배라고 내가 불렀던 사람 같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나보다는 더 총명해 보이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그 친구의 첫 반응은 나와 같았고, 대화를 이어나가며 알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빈곤한 기억의 퍼즐을 서로 맞추다 보니 그 선배는 우리가 알고 지냈던 선배가 맞는 것 같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 그런 사람이 있었어. 그 과정에서 30년을 잊고 지내던 사람들의 이름들과 어린 얼굴들이 마구 나타났는데,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놀라운 희열을 느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쩌면 아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의 경계가 이토록 허술하다. 그 사이에 시간이 쌓이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혼돈이다.

아침에 4년 전에 읽었던 단편소설집을 다시 읽고 있었다. 4년 전에 밑줄 그어놓은 스위트 스폿(sweet spot)이란 단어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 단어를 기억하고 싶어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어놓은 밑줄이었다. 완벽하게 낯선 단어였다. 단어 하나쯤은 그렇다 치더라도 불과 4년 전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은 소설인데도 스토리 전개가 처음 읽는 듯 흥미진진했다. 정말 보잘것없고 믿을 수 없는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정말 내가 모르는 사람입니까?"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흥미로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제 들은 심리학 강의가 마침 기억에 대한 내용이었다. 세 가지 기억의 구조를 배웠다. 감각등록기, 단기기억, 장기기억이다.

감각등록기는 감각 기관을 통해 전해지는 모든 정보, 혹은 처리되지 않은 정보 자체의 형태이다.

단기기억은 활동 기억이며, 말 그대로 짧은 시간 동안 기억하는 것을 말하며 기억 용량에 제한이 있다.

장기기억은 기억의 창고라 볼 수 있고, 비교적 영속적이며 기억 용량에 제한이 없다.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되려면 그 기억과 관련된 단서들을 조직화하는 것과 반복이 도움이 된다. 장기기억으로 되려면 기억이 단단하게 굳어지는 기억의 응고화 과정이 필요하다. 공부한 내용과 이렇게 떠오르는 상념을 연결시켜 기록해 보는 것도 기억의 응고화를 위한 과정이다.


기억을 회상해 내는 데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유도질문에 의해 영향받아 기억의 오류가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피암시화'라고 한다. 어쩌면 나도 "야, 네가 그 선배를 왜 몰라?"라는 유도질문에 영향받아 정말 모르는 사람을 알던 사람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알고는 있는데 입 끝에 그 단어가 맴돌기만 하는 현상, 내가 요즘 진짜 자주 겪고 있는 이 현상을 명명하는 이름이 있다. '설단현상'이다. 이것은 장기기억의 창고에 들어가 있지만 회상해 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말한다. 설단현상과 더불어 어디선가 누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인지, 어느 책에선가 읽은 내용인지 어설프게 기억하는 일들이 잦아진다. 이것은 '원천기억의 오류' 탓이다. '설단현상'과 '원천기억의 오류'는 내가 요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나의 문제이기도 해서 수업을 들으며 귀에 쏙 들어왔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오래전 나와 관련이 있던 일들, 예전에 배워서 분명히 익혔던 것들, 한때 알고 지냈던 사람들인데 까맣게 망각해 버린 기억은 어떤 기억에 속하는 걸까?

이런 것들을 단기기억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조금 서운하다. 하지만 기억의 창고에는 들어가지 못했으니 장기기억도 될 수도 없다. 심리학 용어는 아니지만 인연에도 시절 인연이 있듯 기억에도 시절기억이 있는 셈이다. 단기기억보다는 시절기억이라는 말이 좀 더 위안을 준다. 요즘 내 상태로 보아 공부하고 있는 것들이 단기기억에서 장기기억이 되지 못하고 시절기억이 될 확률이 무척 커 보인다. 하지만 과정이 즐거우니 그것으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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