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대를 찾아서 달리는 마라톤
단거리 육상선수가 200m 경기에 출전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선수는 짧은 코스에 전력을 다해 뛸 것이다. 그렇게 200m가 지나고 뒤의 전광판을 돌아보며 등수를 확인하는데 등수가 뜨지 않는다. 무슨 일일까? 사실 이 선수가 출전한 대회는 42km 마라톤인 것이다. 전력질주 후 이 선수에게 남은 거리는 41.8km. 이 선수의 마음은 어떨까?
믿음이라는 것은 경험에서 형성되는 마음일 것이다. 경험 없이 형성되는 믿음은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믿음 또한 그렇다. 내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은 7년 전 발병했던 나의 피부병이 호전돼서 다시 일상으로 회복했기 때문에 7년 후인 지금에서도 내가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면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이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더운 여름에 발병한 나의 피부병은 찬바람이 부는 현재까지도 호전이 되고 있지 않다.
그랗다. 과거의 경험으로 200m 달리기 시합인 줄 알았던 이번 2차 피부 전쟁은 사실 장거리 마라톤이었다.
믿음이 흔들리며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느끼면서 시작한 것은 페이스 조절을 하며 그냥 버티는 것이다. 마라톤 선수들이 전력질주를 하지 않고 페이스를 조절하며 까마득히 있는 결승대를 향해 달리는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결승대가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다. 이 마라톤이 끝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두려움. 마라톤에 참여하기 전 나의 모습을 내가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이 지치고 계혹되는 마라톤을 내 일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조금씩 차오른다. 괜찮았던 일상을 되돌아보며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 상태가 나의 모습임을 잊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다.
한 TV프로그램에서 방영됐던 기안의 마라톤 참여 영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었다. 누가 봐도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모습에 금방이라도 그만둘 것 같았던 모습이었고 불가능해 보였다. 한 편으로는 왜 저렇게까지 하나라는 마음과 응원을 함께 보냈던 영상이다. 그러나 기안은 결국 그것을 해냈고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기안이나 <오징어 게임>에 출전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참여한다. 올림픽이나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그 나름대로의 의의를 위해 출전한다. 그러나 강제로 이 끝나지 않는 마라톤에 참여한 나는 그 결승전 끝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기안처럼 감동을 줄 수 있나? 누구에게? 이 일이 내 인생에 어떤 흔적을 남길까? 더 큰 대회를 위한 워밍업인가? 그건 그거 대로 절망스러울 일이다. 피부는 인생의 나이테라고 하는데 이번의 비바람으로 나의 나이테는 이미 헝클어지지 않았을까? 도저히 나에게 일어난 일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이 버거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버티고 있다.
과거의 나에게는 흉터와 소극적임을 남겼던 이 병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 다만 희망이 있다면 과거에는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지금은 생각의 찌꺼기를 남기고 맀다는 것이다. 이 행위로 뭐라도 긍정적인 것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떠나 주길 바라본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마라톤에 지쳐있는 개복치를 응원하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