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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May 19. 2024

사랑 앞에서 좌절하고 결심하고 몸을 던지다

(2)에도시대: 시나가와 신주(品川心中) 등

오늘부터 필명을 제 이름인 '김연수'로 변경합니다. 아무래도, 기획출판할 때 제 이름을 걸고 했다보니...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1편에서 설명했듯이, 신주(心中)란 연인 간에 사랑을 표시하기 위한 증거물로, 처음에는 손톱이나 머리카락의 일부를 남기다가 점차 팔뚝에 문신을 새기고 팔이나 허벅지에 문신을 새기다가 마침내 목숨을 걸고 정사(情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보니 겐로쿠 시대(에도 시대 중기)부터 신주 자체가 정사를 의미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시나가와 신주(品川心中), 소네자키 신주(曾根崎心中) 등의 설화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십여 편 이상의 신주 설화가 가부키로 작품화되었습니다. 1703년에 소네자키 신주(曾根崎心中)의 분라쿠가 지카마쓰 몬자에몬이라는 작가의 손에 탄생하기도 했죠. 그리고 1684년 교토, 오사카, 에도의 유곽 이야기를 모아놓은 『쇼엔오카가미[諸艶大鑑]』에 따르면, 13쌍의 연인이 정사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신주가 연극으로 영상화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연인들이 신주를 하기도 했다는 뜻이지요.


사실, 에도 시대 이전에도 신주를 모티브로 한 설화는 있었습니다(아직 '신주'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이었지만요). 고대 일본의 역사책인 『고지키』에 따르면, 가루노미코와 가루노오이라츠메의 사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줄거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5세기 인교 천황이 죽은 뒤 가루노미코의 즉위가 결정되었는데, 그가 여동생인 가루노오이라츠메와 몰래 정을 나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자 가루노미코의 민심이 바닥을 치고, 대신 아나호노미코에게 민심이 기울게 되었다. 가루노미코는 아나호노미코를 공격할 준비를 하다가 대신에게 붙잡혀 유배를 떠났고, 가루노오이라츠메는 가루노미코와 함께 유배행에 올랐다. 두 사람은 유배지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며 목숨을 끊었으니, 신주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는데, 바로 남매간의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가루노미코의 설화를 비롯해 고대 설화들은 남매 간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남매 간의 금기시되는 사랑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 당시에 남매 간의 사랑이 남녀 간 사랑처럼 당연시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 남매나 친족 간 결혼이 흔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왜 강물에 몸을 던져야 했는지, 근거가 빈약합니다. 신주 설화는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더 구체화 되어갑니다.


헤이안 시대의 『야마토 모노가타리』에는 이쿠타가와 설화, 가마쿠라 시대의 『헤이케 모노가타리』 에는 아토오이 신주가 있습니다. 줄거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옛날 셋츠라는 나라에서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했다. 여자는 누구를 선택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괴로워하며 이쿠타강에 뛰어 들었다.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 역시 강에 뛰어들었다. 시체를 건지니, 한 남자는 여자의 손목을, 다른 남자는 여자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고자이쇼는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그리워한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이 애탈 뿐이다. 결국 고자이쇼는 강물에 몸을 던졌고 그녀를 안타까워한 사람들은 남편의 갑옷을 고자이쇼에게 입혀주며 바다에서 장례를 치른다.


위 줄거리가 이쿠타가와 설화, 아래 줄거리가 아오토이 신주입니다. 둘 다 어떤 이유로 강물에 몸을 던졌는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특히 전자의 경우 등장인물이 세 명이라는 점이 독특합니다. 다만, 서로 합의해서 함께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 한 쪽이 죽은 연인의 뒤를 따라 몸을 던진 것이므로, 아직까지 신주 설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주 설화는 에도 시대에 진입하면서, 구체화 되어갑니다(앞에서 설명했듯이 연인끼리 신주다테(心中立て)를 나눠주는 풍습도, 신주(心中)라는 개념도 이때 생겼습니다). 이때, 유행했던 설화는 시나가와 신주와 소네자키 신주가 있습니다. 먼저, 시나가와 신주 설화의 줄거리입니다.


에도 시대, 오소메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한때 오이란(유곽의 유녀들 중 최상위 계층에 존재하는 유녀로, 손님을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일패 기생과 개념이 비슷합니다)으로서 큰 인기를 얻었지만, 나이를 먹고 미모가 퇴색되면서 뒷방 구석에 있어야 하는 퇴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침 봄이 되어 새 기모노로 갈아입어야 할 시간이 오지만 오소메에게는 돈이 없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오소메는 강물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하지만, 오이란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혼자 쓸쓸히 죽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예전에 자신을 찾았던 남자 손님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 중에서 눈에 들어온 남자는 긴조라는 남자였다. 그는 노름판에서 상주하며 가족도 돈도 없는 자였기에, 자신과 함께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긴조에게 편지를 써서 함께 사랑의 죽음, 즉 신주(心中)를 하자고 제안했다. 긴조는 편지의 내용도 모른 채 오소메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매우 기뻐했다. 오소메는 평소보다 정갈하게 꾸민 뒤 긴조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에는 돈이 없어 얼굴을 펼 수 없으니, 더 이상 살 수 없다, 나를 불쌍히 여긴다면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지자고 적혀 있었다. 편지를 읽은 긴조는 당황하며 오소메를 위해 돈을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돈의 액수를 들은 긴조는 결국 오소메를 안타까워하며 그녀와 함께 동반자살을 하겠다고 했다. 긴조는 있는 돈을 다 털어 양복점에서 가장 말끔한 옷을 사 온 뒤, 오소메를 찾았습니다. 두 사람은 시나가와 강물에 몸을 던지기로 약조했다. 오소메는 긴조가 변심할까 봐 먼저 긴조를 강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오소메가 뛰어들려고 할 차에 유곽 주인이 찾아왔다. 그는 돈이 생겼으니 오소메에게 자살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소메는 긴조를 부르려 했지만, 긴조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강물에서 긴조는 혼자 허우적거리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시나가와 강물은 허리까지밖에 차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살아남은 긴조는 오소메에게 이를 갈기 시작했다. 그는 노름판의 친구들과 함께 계략을 꾸몄다. 바로 긴조의 장례식을 치러 진짜 긴조가 죽은 것처럼 꾸미는 계략이었다. 긴조가 관 속으로 들어가자 긴조의 친구는 오소메에게 긴조가 죽었으니 장례식에 와 달라고 간청했다. 긴조가 한량이어도 자신을 사랑했음을 알게 된 오소메는 받은 돈으로 마련한 새 기모노를 입고 긴조의 장례식을 찾았다. 그때, 관 속에서 긴조가 일어나 오소메를 다그쳤다. 오소메는 긴조의 귀신이 나타났다고 생각해 두려움에 떨다가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미안함을 느낀 긴조는 미쳐버린 오소메를 유곽으로 데려다주었는데, 유곽의 주인은 자신의 유녀를 망쳐버렸다는 이유로 긴조를 돌팔매질했다. 결국 긴조는 시체로 전락했고, 주인은 오소메와 긴조를 함께 강물에 빠뜨리라고 했다. 이렇게 오소메와 긴조는 진짜 '신주'를 하게 되었다.


시나가와 신주는 앞에서 설명한 설화에 비해 더 구체적이고, 독특한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죽었던 다른 연인과 달리 오소메와 긴조는 계약관계였다가 점차 사랑에 빠졌다는 점입니다. 한 번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전적도 있고요. 무엇보다 주인공이 유녀라는 점이 독특합니다. 유녀의 특성상 일반 여성보다 남자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을 거부할 수 있으면서도, 돈을 주는 남자 손님에게 운명을 맡긴다는 점이 낭만적(?)으로 다가와 유녀를 주인공으로 한 신주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후 자카마츠 몬자에몬이라는 극작가가 소네자키 신주 설화를 토대로 극본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극본을 가지고 만든 인형극(분라쿠)는 에도의 청춘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죠. 소네자키 신주 역시 유녀가 주인공입니다. 다만, 유녀와 남자가 진심으로 사랑했고, 남자가 사기꾼으로 몰려 궁지에 처하자 갈 곳이 없어, 저승에서라도 함께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연인과 동반자살한 점은 시나가와 신주 이전의 설화들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같은 극작가가 집필한 『신주가사네이쓰즈』의 경우 남자와 유녀가 사랑에 빠진 점은 유사하나 남자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남자가 아내에게 유녀와 연을 끊겠다고 맹세하자, 유녀는 신주를 택하고, 남자는 사랑하는 유녀를 그리워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랐지요. 


연극은 연극으로 봐야 좋은데, 당대 청춘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불륜과 사랑을 오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즐겼고, 미화된 동반자살을1 보고 진짜 신주를 하는 연인들이 늘었습니다. 그러자 에도 막부에서는 1722년, 신주를 반사회적인 행위로 간주하여, 신주를 주제로 한 작품의 출판이나 연극 개최 등을 금지했습니다. 무사(사무라이)가 신주를 했을 경우, 초닌(상인)으로 강등하는 과격한 법을 정하기도 했지요. 이렇게 신주 문화는 사그라들기 시작하다가,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린 후 다시 꽃피기 시작합니다(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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