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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May 26. 2024

사랑의 실패, 체념으로 얻은 평안

(3)메이지 시대: 모리 오가이, <기러기>, 독일 3부작 등

보신 전쟁과 대정봉환으로 인해,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천황이 정권을 잡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면서, 서양의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기모노와 촌마게 대신, 머리를 짧게 깎고 양복을 입은 채, 서양에 국비 유학생들을 대거 보냈지요. '신주'를 금지했던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고 근대 문물이 들어오면서, 잠잠해졌던 '자유 연애' 문화가 다시 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유 연애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관습이 바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유 연애'의 결말은 '신주(心中)'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 글의 주인공, 모리 오가이는 자식들의 이름을 오토, 마리 등 서양 이름으로 지었을 정도로 서양 문물을 추종했던 인물입니다. 그 역시 일본 정부 덕에 국비장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 신주(心中)를 한 적이 없고, 그의 작품 속에서도 신주를 하는 연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독일 유학 시절, 사랑에 실패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엘리제라는 여인을 만났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일본으로 함께 데려왔는데,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엘리제를 독일로 돌려보내고 모리 오가이는 부모님의 주선으로, 해군중장의 딸 도시코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리 오가이는 신주를 하는 대신, 체념과 현실 순응을 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얻은 평안은 가짜 평안, 분노를 잠재우는 수단에 불과했죠. 

모리 오가이가 체념으로 얻은 마음의 평안, 그 속에서 묻어나는 무의식 중의 분노는 젊은 시절에 쓴 작품, 독일 3부작(<무희>, <마리 이야기>, <아씨의 편지>)과 나이 들어서 쓴 <기러기>에 슬며시 드러납니다.



모리 오가이(1862-1922)



모리 오가이는 젊은 시절 독일에서 실패했던 연애담을 독일 3부작에 녹여냅니다. <무희>, <마리 이야기>, <아씨의 편지> 순으로 집필했지요. 


메이지 18년(1885년), 국비 유학생으로 독일에 온 오타 도요타로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를 돈이 없어 곤란해하는 독일 여인 앨리스를 도와주게 되면서, 그녀와 만남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 연애를 곤란하게 여기던 공사관에 의해 오타는 면직당한다. 이때 둘은 함께 살고, 앨리스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이자와 겐기치는 오타에게 신문사에서 일자리를 주고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근근히 벌어먹고 살지만, 학문적 열정은 나날히 퇴색되었다. 아이자와는 일본에서 복직의 기회가 있다고, 오타에게 알려주고 오타는 출세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독감에 걸려 드러눕고 말았다. 그 사이, 아이자와는 앨리스에게 오타의 복직 기회를 알려주고, 이를 들은 앨리스는 편집증에 걸려 미쳐 버리고 말았다. 오타는 병이 낫고 앨리스를 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녀를 버리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모리 오가이, <무희> 줄거리


이 중 <무희>는 작가의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투영한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입니다. 소설은 오타 도요타로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독일 유학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마치 작가가 자신의 연애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얼핏 보면, 연애와 출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출세를 택한다는 간단한 이야기 같은데, 시대를 생각해보면 <무희>는 아주 센세이셔널한 소설이었습니다. 메이지 시대는 양복, 서양 음식 등 겉으로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화된 것 같은데, 속으로는 에도 시대의 구식화된 관습 속에서 살고 있었거든요. 이 때도 정략, 중매 결혼이 만연화된 세상이었죠. 특히, 메이지 천황은 1871년 폐번치현 이후 모든 영지를 천황 직할제로 만들면서, 절대왕정제를 추구했습니다(1871년이면 이미 서양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지 한참 뒤였죠). 그리고 <무희>의 시점인 1885년은 일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는데, 이토 히로부미(우리가 아는 이토 히로부미 맞습니다) 일행이 독일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초대 내각대신으로 취임하고 일본의 법률체계를 정비해 의원내각제를 도입한 해였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은 해였죠. 저자가 1885년에 연애했으리란 보장이 없는데, 왜 굳이 1885년을 소설의 시점으로 정했을까요? 어쩌면, 겉으로는 의원내각제 등 서양 근대 문물을 수입하면서, 속으로는 자유 연애가 불허되는(오타는 자유 연애 탓에 면직당했으니까요) 고지식한 구습으로 얼룩진 일본 사회를 비판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마리 이야기>, <아씨의 편지> 역시 독일 국비 유학생이 남자 주인공으로, 독일 유학 시절 만난 이국의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다만, 줄거리는 <무희>와 약간 다릅니다. 전자는 남주인공 고세가 마리라는 소녀를 만나, 마리의 과거를 들으면서 스토리가 전개되고, 후자는 남주인공 고바야시가 뷔로 백작의 딸 이다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전자의 경우, 고세가 마리라는 여인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었으니 저자의 연애 실패담이 어느 정도 녹여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말 부분을 보면 마리가 물에 빠져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비판하는 점이 <무희>와는 약간 다릅니다. 마리가 빠져 죽은 이유는 독일의 미친 국왕이 마리에게 구애를 했는데, 이 국왕은 옛날에 마리의 어머니에게 구애하다가 어머니가 마리의 아버지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 국왕은 미쳐버리고 '마리'라는 이름(마리의 어머니와 마리는 동명이인입니다)을 잠결에 되뇌이곤 했는데, 세월이 흘러 성장한 마리를 보고 마리의 어머니로 착각해 그녀를 쫓다가 같이 물에 빠진 것이었죠. 비록 '근대 문물'의 상징인 서양 독일이었지만, 국왕이 원하는 여자를 함부로 취하려고 하는, 구시대적인 풍습은 여전히 서양에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비판했다는 점이 <무희>와의 차이점입니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 국왕의 죽음은 신문에서 대서 특필하는데, 마리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대목에서, 독일 역시 (절대왕정을 추구하던)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왕 앞에서 백성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이를 저자가 좋게 보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마리 이야기>에 비해 저자가 추구했었던 자유 연애 사상이 작품에 좀 더 녹여들어갔습니다. 여주인공인 이다 아가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부모님이 정해준 약혼자인 폰 멜하임 남작 대신, 예전에 자신이 구해주었던 언청이 양치기를 사랑했었습니다. 그러나 파도가 덧없이 치던 날, 양치기는 피리만 남겨놓은 채 사라졌고, 이다 아가씨는 원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는 대신, 왕비의 시중을 드는 여관이 되는 것으로 부모님에게 저항했습니다. 이다 아가씨의 상황을 통해, 일본이 그토록 추구하던 신시대적인 서양 독일에서조차 신분을 뛰어넘고, 당사자들의 의사대로 진행하는 자유 연애 결혼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독일 3부작을 보면, 일본인 남주인공이 수동적인 반면, 이국의 여주인공은 주체적으로 활동합니다. 남주인공이 저자 본인을 가리킨다면, <무희>의 미쳐버린 여주인공 앨리스는 저자가 만났던 독일 여인, <마리 이야기>와 <아씨의 편지>의 마리와 이다 아가씨는 저자의 이상향, 즉 상상 속의 독일 여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근대적인 자유 연애 사상을 추구했지만, 현실의 일본 여인들은 '현모양처'가 되는 것을 이상향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두 소설 속 주체적인 여자 주인공들은 저자가 실제 만난 여인들이 아닌, 저자가 만나고 싶어 하는, 혹은 현실의 일본 여인들이 본받기를 바라는 이상향일 것입니다. 


이렇게 젊은 시절에 모리 오가이가 독일 3부작을 집필했다면, 나이 들어서는 <기러기>를 집필했습니다. <기러기>는 여주인공 오타마와 남주인공 오카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점은 <무희>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독일 3부작과 달리, 배경이 일본이고 여주인공 오타마의 시점에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오타마는 집안의 가난 때문에 고리대금업자의 첩이 되었지만, 의대생인 오카타를 만나면서 사랑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녀는 오카타에게 구원을 받아 현실이 바뀌기를 꿈꾸지만, 오카타는 독일 유학을 떠나버리고 오타마는 다시 고리대금업자의 첩으로서 살게 됩니다. 결말 부분에서 오카타는 친구의 권유 탓에 기러기를 쫓아내려고 마지 못해 돌을 던지는데, 그 돌을 맞고 기러기는 죽고 말았습니다. 


<기러기>를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죽은 기러기가 오타마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미 작품 제목을 <기러기>라고 정할 때부터 결말을 생각하고 있었겠지요. <기러기>에서 여주인공 시점에서 짝사랑하는 심정을 잘 드러내려고 한 것도, 저자의 인생과도 관련 있을 것입니다. 모리 오가이는 고쿠라로 좌천 당했는데, 이는 본업인 군의관으로서의 업무에 소홀하고 부업인 창작 업무에 집중한 탓이 컸습니다(예나 지금이나 투잡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는 상사와 동료들의 조리돌림을 당하며, 어쩔 수 없이 고쿠라로 떠나야 했지요. 이 때 얻은 실의가 오타마의 체념으로 녹아들어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체념하면 만사가 편해진다는 씁쓸한 사실도 자각했겠지요.


나는 천하에 버려진 자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자다.


모리 오가이는 생전에 위와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독일 유학을 하면서 자유 연애 사상에 눈을 떴지만, 현실의 장벽은 너무 높기만 했습니다. 그는 체념한 채 두 번의 결혼을 했고, 강제로 맺어진 결혼 생활은 불행하기만 했습니다. 체념한 덕에 평안해졌지만, 이러한 평안은 어쩌면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평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체념한 채 살아간 모리 오가이의 작품은 현실에 저항하다가 신주(心中)의 길을 걸은 두 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 영향을 줍니다(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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