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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un 02. 2024

불사의 강 앞에서, 죽음을 추구하다

(4)다이쇼 시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느 바보의 일생> 등

1912년 무쓰히토 천황이 세상을 떠나고, 요시히토 천황이 즉위하면서 메이지 시대가 막을 내리고 다이쇼 시대(1912~1926)가 시작되었습니다. 러일 전쟁 이후 심화되던 군국주의 체제가 완화되면서, 일본 대중은 서양과 일본의 혼재된 문화를 향유하며 편안하게 살았죠. 이후 쇼와 시대 때,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고 패전하면서 몰락하니, 다이쇼 시대는 일본 입장에서 폭풍 전의 평화, 썩기 직전의 가장 달콤한 사과와 같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이쇼 시대 역시 편안했던 것은 상류층이었고 일반 서민과 하층민, 식민지배를 받던 백성들은 여전히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설탕으로 코팅한 이물질과 같았던 시대, 신주(心中) 문화 역시 계속 진행되었고, 현실에 회의감을 느끼고 신주를 하다가 자살로 이어진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로 세기말에 태어나 쇼와 2년에 세상을 떠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입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3편에서 소개했었던) 모리 오가이를 존경했었습니다. 그는 1915년에 등단하기 전 오가이의 역사소설인 <아베일족>과 <햐쿠모노가타리> 등을 여러번 읽었고, 그의 소설을 토대로 작품을 집필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의 소설에서 같은 장소가 등장합니다. 오가이의 소설에는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스미다강이 등장하는데, 아쿠타가와가 집필한 <오카와노미즈>에는 오카와강이 등장하는데, 오카와강은 스미다강의 다른 이름이었죠. 뿐만 아니라, <오카와노미즈>에 등장했던 베네치아 풍경은 오가이가 번역한 프랑스 소설 <즉흥 시인>에 실린 <물의 도시>에도 등장합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다만, 아쿠타가와가 오가이의 소설을 모방하는 데서 그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리 오가이가 스미다강을 유년 시절의 향수를 느끼며 작품을 집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소로 묘사했습니다. 아쿠타가와 역시 오카와강에서 유년 시절의 향수를 느끼려 했지만, 실제 오카와강은 유년 시절과 멀어진 채 죽음의 기운을 띄고 있었다고 묘사했습니다. <오카와노미즈>에 따르면, 오카와강에서는 기적소리가 울려퍼지고 기름으로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겉으로는 번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썩어가는 다이쇼 시대를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왜 존경했던 선배 문인과 달리, 오카와강에서 '죽음'의 기운을 느꼈을까요?


사실 아쿠타가와는 유년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누나는 6살에 요절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다가 미쳐버린 채 아쿠타가와가 11살 때 죽었고요. 아쿠타가와는 12살에 부모 곁에서 떨어져 외삼촌에게 입양되었습니다(사실 '아쿠타가와'라는 성은 외가의 성이었죠. 외삼촌 집안에서 자라면서 원래 성을 버리고 외가의 성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쿠타가와는 일찍 죽은 누나와 미쳐 버린 어머니를 어릴 때 보면서, '나중에 나도 커서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죽음'을 너무 이른 나이에 경험한 탓에, 그가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할 때까지 '죽음'이 무엇인지, 언제 죽는지, 왜 사람은 때가 되면 죽는지 등을 평생 고뇌했습니다. 물론 대역사건(1910-1911[1])이나 관동대지진(1923[2])으로 인해 일본 사회가 혼란스러워, 커서도 사람의 죽음을 쉽게 접한 탓도 있겠지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집필한 에세이 <어느 바보의 일생>에서 인생에 관해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은 지옥보다 더 지옥스럽다."


"인생이란 돈 대신에 생명을 지불하는 커피숍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인생의 한 줄의 보들레르만도 못하다."


인생은 '지옥'과 같다며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밥을 편히 먹고 나서 소화가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듯, 인생은 예측이 어렵기에 지옥 같은 무법지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인생은 '커피숍' 같다며 가볍게 묘사하기도 했는데, 돈을 주고 커피를 마시듯, 살면서 생명을 내어주는 대신 좀 더 다양한 내세를 누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묘사이죠. 그런데 '보들레르'의 경우, 사람의 이름입니다. 보들레르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인으로, <악의 꽃>이라는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시를 써서 풍기문란죄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죽음조차 관능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도리어 인생이 허무하다는 식의 주제를 드러낸 시죠. 세기말, 유럽에서 낭만주의를 넘어 허무주의, 염세주의가 퍼지고 이러한 풍토가 다이쇼 시대 일본의 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이렇게 아쿠타가와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면서, 연애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에세이에서 드러냅니다.


자유주의, 자유연애, 자유무역 - 어떤 자유든 그 술잔 안에는 다량의 물이 섞여 있다. 그것도 대게는 고여 썩은 물이.
얼핏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보이기 쉬운 경우조차, 그것은 사실 우리를 지배하는 프랑스의 보바리즘이다.
연애란 단지 성욕이 시적 표현을 받은 것이다. 적어도 시적 표현을 받지 않은 성욕은 연애라고 부를 가치가 없다.



<어느 바보의 일생>에는 인생, 죽음, 연애에 관한 아쿠타가와의 생각을 드러낸 구절이 많은데, 그 중 그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낸 구절을 선별해 발췌했습니다. 첫 번째 구절을 보면, 그는 자유연애를 '썩은 물'에 비유했는데, 이는 <오카와노미즈>의 오염된 오카와강을 떠올리게 합니다.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유년 시절의 향수를 상실한 강이었죠. '자유연애'도 서구 문물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이를 비판적으로 본 게 아닐까 싶은데, 두 번째, 세 번째 구절을 보면 그가 '자유연애'뿐 아니라, '연애'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보바리즘'은 과거와 미래의 환상적인 모습에 사로잡혀 현실을 부정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인데, 이러한 말의 어원을 만들어낸 '마담 보바리'는 현실의 남편을 저버린 채 소설 속의 아름다운 연애만을 꿈꾸는 인물이었습니다. 아쿠타가와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젖어 자신의 생명을 함부로 버리는 연인들을 비판적으로 보았죠. 연애란 성욕과 시적인 표현의 결합에 불과하다고, 즉 성욕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요.


사실 아쿠타가와는 요시다 아요이라는 여인을 사랑했었는데, 집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의 쓰디쓴 아픔이 연애를 '환상'에 불과하다고 비웃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히라마쓰 마스코라는 여인과 신주를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래의 대목을 만들어냈죠.


"죽고 싶다기보다 사는 게 질렸습니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며 함께 죽기로 약속했다.
"플라토닉 수어사이드."
"플라토닉 더블 수어사이드."
<어느 바보의 일생> 47.불장난에서
그는 그녀와 함께 죽지 않았다. 다만 아직 그녀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왠지 만족스러웠다.
(생략)
그는 홀로 등나무 의자에 앉아 참나무 어린 잎을 바라보며, 종종 죽음이 가져다줄 평화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바보의 일생> 48.죽음에서



히라마쓰가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아쿠타가와의 신주는 실패했습니다(만일 신주에 성공했다면, 에세이도 쓸 수 없었을테니 그의 신주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겠죠). 연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아쿠타가와가 왜 신주를 시도했을까요? 사실 히라마쓰는 아내의 친구였습니다. 아쿠타가와는 그녀에게 "사는 게 질렸다"고 말했죠. 이 대목을 보면, 그가 자살을 결심한 이유는 단순한 연애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토닉 러브"나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뜨거운 열정에 불타오른 관계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왜 혼자 죽지 않고 여인과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했을까요?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아마 죽음을 함께하는 (연인이 아닌) 동반자가 있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평생 외로웠던 삶에 위안을 줄 존재 말이지요. 하지만 히라마쓰는 그를 배신했고, 그는 쓰디쓴 연애의 아픔을 다시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그의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자살 시도를 했고, 또다시 실패했습니다.


그는 혼자 자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창살에 끈을 걸어 목을 매서 죽으려고 했다.
(생략)
그러자 조금 고통스럽다가 모든 것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을 한 번 넘기만 하면 죽음으로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아쿠타가와는 목을 매서 자살 시도를 했던 경험과 그때의 고통을 <어느 바보의 일생>에 녹여냈습니다. 실제, 아쿠타가와는 매형의 자살과 친구의 발광 등 주변인이 겪는 고통을 보면서, 더 인생의 허무함과 자살 충동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마지막을 지켜줄 여인은 없었습니다. 그는 친구 구메 마사오에게, 동반자살을 권유하는 대신 자신의 에세이 <어느 바보의 일생>을 건넸습니다. 에세이의 제목으로 나오는 "바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1927년 7월 24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수면제로 음독 자살을 했습니다. 향년 35세였죠.


아쿠타가와의 죽음에 대한 관념은 유고작인 <어느 옛 친구에게 보내는 수기>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믿는 서양인들과 달리, 자살을 죄악시하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살을 미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전과 달리 자신과 죽음을 함께할 여인이 없다고만 말할 뿐이었죠.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썩어들어갔던 다이쇼 시대를 풍미했던 문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시대는 변하고 그의 뒤를 잇는 새로운 문인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5편에서 계속).




[1]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26명의 사회주의자가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사건으로, 죄목은 사회주의자 탄압의 구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있다.

[2]도쿄 전체가 10여분 간 흔들린 대지진으로, 이때 조선인들이 혼란을 틈타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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