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대한 기다림]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

by 사막의 소금



“어떤 학생은, 문장은 매우 훌륭한데 슬픔의 원인에 대해선 전혀 힌트를 주지 않아 공허한 글쓰기를 계속한다… 저항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제는 안다. 그 아이도 침묵이나 생략의 방식으로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실은 자신도 모르게 ’아픔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다’는 닫힌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ㅡ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정여울




더 이상 살 기운이 없어서, 살아 숨 쉴 자신이 없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삶에 대한 마지막 책임감으로 정신 상담을 받으러 갔다. 이 선택은,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했던 그 의사가, 사별한 자신의 남편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는 지인의 진심 어린 조언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진료실 의자에 앉아 의사를 마주하고도 아무 말도 표정도 짓지 못했다. 그렇게 5분, 10분, 시간은 흘러갔다. 나도 그도 그저 앉아 조용히 그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세 번째 방문까지도, 나는 많은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며 그 자리에 앉았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이 시작이었고, 무엇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었는지 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 동안 찾으려 했던 답이 그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입을 떼지 않는 나를 위해 그는 매 상담마다 몇 가지 검사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 결과지를 보고도 아무 말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저 앉아만 있다 가도 괜찮습니다. 이런 환자들이 있어요. 평생 누구에게도 어려움을 말해본 적이 없어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며 덤덤하게 말해주었다.


괜스레 눈물이 흘렀다. 내 침묵을 이해해 주는 듯한 말이었다. 그제야 나는 어렵게, 내가 짊어진 짐들을 감정 없이 쭉 나열해 보았다. 그것이 내가 숨 쉬게 된 첫 호흡이었다.


침묵이나 생략으로 아픔을 표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방식이 없기 때문일 수도, 또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다려주는 것, 침묵해도 괜찮다고 조심스레 말해주는 것, 그리고 그 침묵을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받은 진정한 위로는 그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회복의 전부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마중물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물을 얻을 수 없듯이, 침묵을 선택한 이들을 기다려주는 일은, 그들이 다시 숨 쉴 수 있게 하는 첫걸음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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