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의 첫 콤플렉스

by 티타임 스토리

22살. 대학교 3학년을 앞두고 자퇴를 했다.


그 누구에게도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하는, 망할 놈의 대학을 자퇴했다.


난 입시에 실패했다.


입시 정보 따윈 부모님도 선생님도 제대로 알지 못 했던 그 시절, 상위 15% 안에 들면 지원할 수 있는 지방의 국립대학에 수능 특차로 입학했다.


처음엔 기뻤다. 공부 잘하는 선배들도 많이 가는 대학이었으니까.


그런데 입학과 동시에 알게 되었다. 나보다 수능 점수가 100점도 넘게 낮은 학생들이 추가합격으로 줄줄이 들어온다는 것을. 나와 비슷한 성적의 친구들은 훨씬 좋은 대학에 합격해 다니고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였다. 학력 콤플렉스라는 게 생겨버린 건. 99학번은 지워버리고 싶은 숫자가 되었다.


내가 더 똑똑하고 야무진 사람이었다면 3학년 때 편입을 목표로 학점 관리와 토익을 준비했을 것이다. 아니면 학교를 다니면서 수능을 다시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수는 안 된다는 부모님의 말에, 난 그저 이 학교를 선택한 자신을 원망하며 시간만 보냈다.


그 결과, 1학년 1학기와 2학기 모두 학사경고.


2학년 때도 정신을 못 차리고 겨우 학사경고를 면할 정도로만 다녔다. 그러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면서, 나도 자퇴를 해버렸다.


나도 가고 싶었다. 미국은 너무 비싸니 상대적으로 저렴한 호주나 캐나다라도... 하지만 부모님은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학원 강사로 취직했다. 난 영어를 잘했다.

중학생 영어를 가르치다가 중3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그다음 해부터는 고등학생 수업까지 맡게 되었다.


시험 기간에는 주말에도 보강하느라 바빴지만, 월급 받는 게 좋았다. 당시 200만 원 좀 넘게 받았는데 꽤 큰돈이었다. 6살 많은 사촌언니가 여의도 대기업에 다녔는데, 나랑 월급이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아이들이 어느 대학 나왔냐고 물어보는데, 난 휴학한 대학생이라고만 얘기할 뿐 내가 다닌 학교를 말할 수 없었다. 같은 학원의 다른 강사들은 다들 이대, 외대, 경희대...


아이들이 물어볼 때마다 "비밀이야"라며 짜치는 말로 넘어갔지만, 스스로 더욱 작아졌다.


학원에 원어민 강사들과 유창하게 대화하는 한국외대 출신의 영어 강사가 있었다. 전공은 스페인어지만 정작 전공어는 못한다는... 대학교 3학년 때 영국으로 1년간 어학연수를 갔는데, 센트럴 런던의 한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엄청나게 영어 회화가 늘었다고 했다.


'이거다...'


내가 조금 더 당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방법.


1년 반 동안 1,700만 원 정도 모았으니, 6개월만 더 일해서 영국 1년 어학원비와 체류비를 모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목표가 생기니 마음이 분주해졌다.


Grammar in Use 책과 아이엘츠 교재를 사서 풀어보는데, 이미 수능 문제를 많이 풀어서인지 너무 쉬웠다.


미국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난 영국으로 간다고 메일을 보냈다. 헤어지자는 말을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그동안의 고마움과 앞으로의 행운을 비는 내용에서 마지막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늘 긍정적이고 다정한 말을 건네며, 먼 거리여도 데리러 오고 바래다주었던 자상한 사람. 유명인의 부잣집 아들이란 배경임에도 자랑하고 내세우지 않던 사람.


미성숙하고 자존심만 센 나에겐 과분한 존재였다.


국제전화가 몇 번 왔으나 받지 않았다.


나의 첫사랑이자 베스트 프렌드였던 남자친구와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렇게 꿈꿔왔던 런던으로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아빠는 몇 달 전부터 엄마와 싸우고 집을 나가 근처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었고, 남동생은 군대에 있었으며, 혼자 남은 엄마는 도박에 빠져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멀리 간다고 출국하는 날은 아침부터 계속 울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이놈의 집구석은... 지긋지긋했다.


고위공무원인 아빠는 늘 여자가 끊이지 않았고, 내가 대학교 1학년때부터 도박에 빠진 엄마는 살림을 거덜내기 시작하더니 불과 2~3년 사이 수억 원을 잃었다.


'그렇게 잃을 돈으로 나 재수나 시켜주지. 나 유학이나 좀 보내주지...'


허무한 원망을 속으로 뱉어내며 살다가, 난 결국 나를 아무도 모르는 아주 먼 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 도착하면 마냥 즐거울 줄만 알았는데... 내 예상과는 달랐다.


아주 많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