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하기 좋은 경기도2
창업하기 좋은 경기도
사업계획서, 지원서, 증빙서류
내가 사무실을 구할 때 기관에서 요청했던 세 가지야. 어떤 사업을 할 것이고 얼마나 성과를 낼 것으로 예상하는지를 정리한 사업계획서와 '그래서 제게 사무실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신청서. 마지막으로 여태까지 해온 것에 대한 증빙서류들. 증빙서류라고 해봐야 사업자등록증이 있으면 내시오, 매출내역이 있으면 내시오, 하는 정도의 것이었어.
덕업일치 11편이 되어서야 말하는 거지만, 나 꽤나 문서매니아거든. 행/열 딱딱 맞게 문서 작성하고 내 주장 뒷받침하는 자료 예쁘게 잘라 넣어서 다꾸 아닌 문꾸(문서 꾸미기!)하는 재미로 회사 생활 했던 사람이었어. 사무실을 갖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첫 지원서를 얼마나 예쁘게 작성했나 몰라.
잠깐 여기서 지원사업 지원서 쓰는 팁 하나 주자면, 그 시기에 창업 씬에서 많이 쓰는 용어를 알아내서 내 사업에 적용하는 게 좋아. 예를 들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업 씬에 넘쳐났던 '여러 유저를 한 사이트에 모아서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면 '플랫폼' 혹은 '마켓플레이스', '커머스'이런 말을 활용하는거야. 코로나 때는 블록체인, 메타버스가 하도 유행이어서 그런 말을 쓰지 않으면 지원서가 작성이 안될 정도였어(물론 나는 블록체인, 메타버스는 전혀 모르고 있어서 그 당시 그런 단어들은 양심상 못 썼어) 요즘은 생성형 AI가 대세인 것 같더라?
서류 통과하면 발표 심사!
어느 날 메일이 날아왔는데, 뭐야뭐야! 나 서류 합격했다잖아! 발표자료는 언제까지 내세요, 몇 날 며칠 몇 시에 여기로 오세요, 안 오면 탈락입니다, 시간 조정 불가! 이런 메일이 날아온 후에 나는 바로 발표자료 준비에 들어갔지. '내가 또 왕년에 PPT 좀 잘 꾸며서 교수님들에게 이쁨받았던 경험이 있지 엣헴,'하면서 오랜만에 PPT를 열었는데 세상에 PPT가 이렇게 어려운 문서 툴인줄 나는 몰랐네. (졸업한지 너무 오래된 건 아니고?) 이미지도 넣고 영상도 넣고 낑낑 거리면서 발표자료를 준비했어.
얼마 전 에스파 윈터가(나 에스파 좋아함) 빠더너스 나와서(문쌤도 좋아함) 이런 말을 하더라고. "나는 준비가 안 된 상태를 싫어한다. 준비가 되었나 안 되었나 스스로 가늠하는 것도 싫어한다. 준비를 얼마나 했는지 생각을 안 할 정도까지 연습을 해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쁜 애가 생각도 강인해서 윈터가 더 좋아졌자나. 내가 바로 저런 인간 중에 하나라서 극공감하기도 했어. 사무실을 얻기 위한 첫 발표 역시 그랬지. 밤이 새도록 모든 장표와 모든 대사를 다 외우고, 틀린 부분을 안 틀리게 수 십 번 반복 연습하고, 심사 장소까지 버스 타고 가면서도 계속 대사를 외우면서 가고, 내 이름이 호명될 때까지 무한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기다리다가 문 열자마자 씨익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하고 자리를 찾아 들어가고, 마이크 들고 한숨 크게 내쉰 후 "안녕하세요. 엘디프 대표, 양보라 입니다.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를 내뱉으면 벼락치기 한 정보들이 뇌에서 입으로 흘러나오다가 발표가 끝나지.
질의응답? 그것도 예상 질문을 몇 십 가지 생각해서 나만의 논리를 만들어 가야 마음이 놓여. 내가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기면 도저히 잠이 안 와. 그 심사는 더 그랬던 것 같아. 사무실을 정말정말 얻고 싶었거든. 그래서 남편이 보든 말든 혼자 방을 서성이고 중얼중얼 거리면서 답변하는 연기 연습(?)을 많이 한 기억이 나.
아아 맞다, 결국 최종 합격해서 입주 함!
전희성 - 물수제비
덕업일치 Issue No.11의 커버로 선보인 작품은 엘디프와 두 번 째로 계약을 체결한 작가이자, 엘디프로서 첫 판매를 개시해주었던 전희성 작가의 <물수제비>라는 작품이다. 전희성 작가를 2017년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서 보았으니 벌써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나 보다. 그림이라는 것을 거의 처음 보았던 그 때에도, 수 만 장의 작품과 이미지가 딥러닝 되어 스스로 생성형 AI가 될 것만 같은 지금에도 이 그림이 참 예쁘다. 새삼 전희성 작가의 작업 스타일이 명료하게 다가온다. 책도 내고 대기업과 콜라보레이션도 활발하게 하던 최고의 작가가 어떻게 아무 것도 없는 (지금도 별 것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엘디프와 계약을 맺었는지 아직도 신기하다. 그 계약이 수년이 흘러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더 신기할 수밖에. 충정로 인근 소호정에서 국시 한 그릇 한 후 카페에서 각자 날인을 하며 계약을 맺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대면 계약도 없어지고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져서 작가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고 계약하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지금은 누적 계약 작품이 4000점이 넘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40여 점 정도였다. 저 때의 전희성 작가는 어린 아이들을 둘이나 키우고 있어도 대단히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만한 어른이고 지금도 그러한데, 지금의 나는 어린 아이들을 키워야 해서 어른 흉내를 낸다. 첫 사무실이 설레고 벅찼지만, 지금은 본사와 지사로 나뉜 두 개의 사무실을 하나로 합칠 고민을 하니 사치가 충만하다. 오랜만에 궁금해서 들어가 본 작가의 인스타그램이 올해 4월을 마지막 피드로 하고 있다. 작가님, 요즘도 <집으로 출근> 하시는지요? <인생은 즐겁고, 어린이는 귀엽지>는 정말인 것 같습니다.
작품 정보 - 물수제비, Digital Drawing, 2017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