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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Aug 16. 2022

사장님 뚠뚠 졌어요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도구

내가 매일 출근하는 공장은 호치민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날마다 긴 시간을 출근하는 것이 불편하긴 하지만, 무엇보다 점심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우리 회사와 같은 공단에 위치한 몇몇의 한국 회사들은 같은 회사 안에 여러 명의 한국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구내식당에 한국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고용해서 점심식사를 해결하곤 한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 공장에 한 명뿐인 한국 사람을 위해서 따로 한국 요리를 준비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다행히 나 같은 사람을 위해 공단에서 10분 거리에 한국 식당이 있다. 반경 30분 거리 안에 딱 한 곳이 있는데, 음식의 질을 떠나서 일단 한국 음식점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뿐이다. 점심마다 그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한 달에 한번 정산하는 방식으로 구내식당처럼 이용하고 있는 곳인데, 넓은 홀과 2개의 방을 합쳐서 20개 이상의 테이블이 있는 작지 않은 규모의 한국 음식점이다. 나는 보통 김치볶음밥이나 해물순두부, 제육볶음 같은 메뉴를 시킨다. 가끔 라면과 김밥을 먹을 때도 있다. 


매일 점심시간, 10분 정도 차를 탄 뒤 도착하는 식당의 커다란 통유리 문을 밀고 들어가면, 정면 카운터에는 한국인 남자 사장님과 베트남인 부인이 앉아있고, 대학생 정도 나이가 되어 보이는 베트남 여자 종업원 3~4명이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한국어에 관심이 있는 종업원들이 많아서 어제 배운 한국어로 한마디 걸어보려고 노력하는 종업원도 있고, 우리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말하는 종업원이 있기도 하다.



오늘 점심도 여느 때 와 같이 30도 중반을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다. 빨리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돌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따끈한 통유리의 투명 플라스틱 손잡이를 밀면서 식당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요.", "안냐세요." 소리가 한꺼번에 섞여서 들려오고,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친 한 종업원이 내가 항상 앉는 에어컨이 켜져 있는 방으로 안내하며 방문을 열어준다. 네 개의 나무 테이블이 놓여있는 커다란 방에는 오늘도 역시나 나 혼자밖에 손님이 없다. 매일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손님보다 종업원이 많은 날이 절반은 되는 것 같다. '이래서 장사가 되는 건가?' 싶긴 하지만, 여기가 망하면 나도 밥 먹을 곳이 없어진다는 생각에 매일 부지런히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중이다. 


"사잔님, 메뉴 여기."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는 여자 종업원이 오늘도 반말로 나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이 종업원은 종종 이렇게 단어들만 나열해서 얘기하는데 어쨌든 다 알아들을 수는 있다. '근데 암튼 오늘은 뭐 먹지? 어제는 김치볶음밥 먹었고, 그제는 뭐 먹었더라?' 이틀만 지나도 뭐 먹었는지 기억도 못할 거면서 또 열심히 메뉴를 고르고 있다.


"엠 어이!" 베트남어로 동생이란 호칭의 말로 종업원을 부르고 손가락으로 해물순두부 사진을 가리켰다.


"네." 종업원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얼마 전엔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고 그냥 말로만 시켰더니 다른 메뉴가 나온 적이 있었다. 여기선 이렇게 메뉴 선택과 상관없이 랜덤 박스처럼 음식을 받게 될 확률이 가끔 있다. 하지만 오늘은 확실히 무슨 메뉴인지 알겠다는 확신에 찬 종업원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제대로 된 해물순두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잠시 후 그 종업원은 내 테이블로 돌아와 밑반찬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말을 건넸다. "사잔님!"


"어? 왜? 뭐 할 말 있어?" 나에게 미소를 보이며 뜸 들이고 있는 종업원에게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었다.


"네. 사잔님 뚠뚠 졌어요." 이렇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서 킥킥대며 웃고 있다.


"뭐? 뚠뚠 진 게 뭐야? 뚱뚱해졌다고?"


"네. 사잔님 옛날 날씬였는데, 지금 뚠뚠 졌어요. 옛날 잘생긴인데, 지금 못생긴 이예요. 하하하하."


"엥? 뚱뚱해져서 못생겼다고?"


"아니. 못생긴 아니고, 지금 조금 잘생긴 이예요." 못생겼다는 말이 맘에 걸렸다보다. 조금 덜 잘생겨졌다고 말을 바꿨다. 


나는 지난번에 김치찌개 대신 김치볶음밥 나왔던 거 식당 사장님한테 컴플레인 안 하고 그냥 먹어줬는데, 이 종업원은 오늘 나에게 모욕감을 줬다.



'뚱뚱하다', '날씬하다'라는 단어를 배웠나 보다. 언젠가 한번 써먹어봐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오늘 나한테 써먹은 것 같다. 


외국어를 배우면 재밌는 일들이 생긴다. 괜히 한 마디씩 해보다가 외국인인 상대방이 마법처럼 진짜 그 말에 반응해 움직이면 더 재밌어진다. 이렇게 또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재밌어서 나도 외국어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코로나가 끝난 후, 그 식당으로 다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때 그 대학생 직원은 보이지 않고 또 다른 종업원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종업원이 계속해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한국이라는 세계와 연결되는 또 한 명의 베트남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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