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없지만 완연한 봄날

바르샤바의 마지막 날

by 미 지

폴란드는 쇼팽의 나라다.

바르샤바에 있는 국제공항 이름도 프레드릭 쇼팽 공항이다.

쇼팽 동상이 있고 쇼팽 박물관이 있어서 길을 걷다 보면 자꾸만 80년대 이탈리아 가수 가제보(Gazebo)의 노래 'I Like Chopin'이 생각났다.


Rainy days never say goodbye


난 비가 오는 날 바르샤바와 첫인사를 했고

비가 오지 않는 맑은 오늘 say goodbye 산책을 했다.


구시가지 광장을 오랫동안 걸었고, 왕궁정원 앞으로 난 지하보도를 건너 비스와 강가로 내려가 산책을 했다. 토요일이지만 강가까지 산책하러 나온 사람은 적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조금 더 강과 닿아있는 수변 산책로를 걸어보려고 하다가 멈추었다. 휑한 산책로는 어쩐지 좁아 보였고 물살은 어지럼증이 생길 만큼 빨라 보이는 데다가 바람이 무척 심했다. 사흘 전에 넘어져서 아직까지 시큰한 무릎 핑계를 대며 그냥 위쪽으로 난 산책로를 걸었다.

구글지도가 편하긴 한데 가끔 방향을 못 잡아서 헤매게 될 때가 있다. 휴대폰을 보며 길을 걷다가 계단 턱 하나를 놓쳐서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을 살짝 다쳤다. 걸어 다닐 때 아무 문제도 없이 잘 걷다가 물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래쪽의 좁은 산책로까지 내려갈 수 있게 설치된 계단 입구에 붙어있는 경고문을 보며 어쩐지 무릎이 시큰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센트럴역 앞에 있는 대형간판에 스포츠 선수들이 작전회의를 하는 것 같은 그림이 있다.


'YOU ARE EU'


이제야 그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갔다.

폴란드 극우민족주의 집권당이 폴란드의 EU 탈퇴를 외치며 유럽연합과 마찰을 빚던 중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EU·나토와 단결해 러시아의 야욕에서 폴란드를 지켜내야 한다'라고 의견이 단합되어 최근에 반유럽연합기류가 사라졌다고 한다.

나도 그 점을 믿고 우크라이나 바로 옆에 있는 이 나라로 왔으니 당신들이 EU 여서 다행이라고 마음 하나를 보태본다.


전통 시장에 사람들이 많았다. 가벼운 쇼핑으로 선물을 준비해서 숙소로 돌아올 때 동상이 많이 세워진, 그리고 그라피티도 많이 볼 수 있었던 골목들을 천천히 기억하며 길을 걸었다.

부활을 품고있는 사순의 기간, 마침내 부활절이 오면 겨울에 밀려났던 초록잎들과 꽃들이 축제와 함께 온 거리에 깔리게 될 길에 꽃은 아직 없었고 바람이 약간 쌀쌀했어도 완연한 봄이었다.

건물 앞에 한껏 멋을 부린 자전거 두대를 세워 둔 이탈리아 음식점의 아웃테리어가 귀여웠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의 전환기들이 왜 이렇게 문제성이 있고 괴로운 위기들을 만들어 내느냐 하면, 그 전환기를 성공적으로 지내기 위해 우리는 예전에 중히 여기던 것들과 옛날에 써 오던 방법들, 사물을 보던 방법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롭고 더 좋은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 등을 발육시킨다는 것은 옛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 등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숙한 깨달음'이란 지난 세월 내가 갖게 된 선입견과 편견을 이해하고 개선할 때만 가능해진다. 나에게 내재한 존재를 깨닫기 위해서는 두 가지에 모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낯선 것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것이다.

이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 당신은 포기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먼저 소유해야만 한다. 가진 것 없이는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다. 당신이 이긴 적도 없으면서 이기기를 포기하면 당신은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실패자인 것이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정체감을 포기하기 전에, 어쨌든 먼저 그것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당신의 자아를 발달시켜 놓아야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이지만 나는 이것을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에 많은 사람들이 발전의 이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의지력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훈련을 하지도 않고 성자가 되는 지름길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뿐 아니라 바라기까지 한다. 가끔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사막으로 은거한다든지 목수 일을 하는 식으로 성자의 겉모습을 모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모방을 통해 그들이 정말로 성자가 되고 선지자가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어린아이들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꿰뚫고 나가야만 한다는 괴로운 사실을 모른다. (스캇 팩, 아직도 가야 할 길)


어쩌면 그의 말처럼 내가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에서 훈련을 하지도 않고 성자가 되는 지름길을 찾고 싶어서 훌쩍 떠나온 한 달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해도 나는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서 뜻을 두고 달려온 일을 하는 가운데 힘든 길을 지내오면서 키워 온 제법 괜찮은 정체감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줄곧 '지난 세월 내가 갖게 된 선입견과 편견'을 이해하고 개선하고 싶은 마음을 찾는 데 더 집중을 하려 애썼다. 이 한 달의 시간이 나에게 내재한 존재를 깨닫기 위해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낯선 것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연습을 하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랐다.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들과 인생의 남은 여정이 그런 것처럼 결론은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휘청거리는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맞이할 비 오는 안녕도, 비가 오지 않는 안녕도 언제나 환대할 수 있게 되기를 나는 여전히 꿈꾸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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