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본인이 ‘응애’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성소수자였다고 주장한다. 본인은 처음부터 레즈비언으로 태어났으며 성 지향성은 바뀔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레즈비언이 되겠다고 ‘선택’하기도 한다. 여기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선언 속에는 ‘이성애’를 거부하고, 여성을 사랑하겠다는 실천적 의지가 담겨있다. 어떤 여성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여자랑 노는 게 재밌어서, 남성과의 유대를 끊어내고 싶어서 레즈비언이 된 세 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에게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자.
퀴어 여덕에서 레즈비언이 되기까지 / 운
나는 남자에게 끌렸(다고 믿었)고 남자와 연애했음에도 ‘퀴어영화’를 참 좋아했다. 다양한 컨텐츠를 접하면서 자연스레 퀴어프렌들리한 사람이 되었고, 이성애자지만 스스로를 앨라이*라 규정하며 성소수자들을 지지했다. 한편으로는 나는 여자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기 때문에 퀴어는 아니라고 단정지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영화 ‘캐롤’을 보고 생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케이트 블란쳇의 깊은 목소리, 시선을 사로잡는 눈빛, 크고 가느다란 손, … 그의 모든 것에 마음이 일렁였다. 그 마음은 ‘케이트 블란쳇같은 사람이 있다면 나도 여자랑 연애할 수 있어’라는 가능성으로 이어졌다. 이후 몇 명의 배우를 덕질하며 나의 성 지향성을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 정체성, 로맨틱과 섹슈얼의 차이를 알아가며 젠더론을 공부했고, 형형색색 수십 가지의 젠더 분류표를 보며 나를 끼워맞추려고 했다. 결국 팬로맨틱* 헤테로섹슈얼* 시스젠더 여성으로 정체화했는데,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지 못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여성과의 깊은 스킨십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성과 한차례 연애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삶을 무지개로 물들이며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하고, 퀴어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고,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덕질에 깊게 빠지게 된 시기도 그와 비슷한데 배우들 생일 서포트를 위해 돈을 내고, 굿즈를 사들이고, 사진과 영상을 수집하면서 행복을 느꼈다. 좋아하는 배우가 잘되면 내가 잘되는 것 같이 기쁘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내 하루도 가라앉았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모든 것을 이상화하고, 그로 인해 감정이 크게 동요되는 것이 곧 그를 향한 사랑이라 믿었다.
그러나 단순히 상대를 일방적으로 이상화하는 행위는 사랑과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미지의 파편들을 소비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 이미지들은 실제 그 사람의 모습과 거리가 있었으며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성소수자'로 타고나야만 여성을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 역시 허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여성을 지지하고 함께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사랑의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대상화를 멈추고, 현실의 여성들을 애정하고,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나서야, 비로소 레즈비언이 될 수 있었다. 규범에 나를 끼워 맞추지 않고, 누구보다 나에게 집중하고, 내 옆에 있는 여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누구나 레즈비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Let’s Be Lesbians
* 앨라이: 성소수자가 아니지만 성소수자들의 인권 개선을 지원하고, 성소수자 차별을 반대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