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본인이 ‘응애’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성소수자였다고 주장한다. 본인은 처음부터 레즈비언으로 태어났으며 성 지향성은 바뀔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레즈비언이 되겠다고 ‘선택’하기도 한다. 여기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선언 속에는 ‘이성애’를 거부하고, 여성을 사랑하겠다는 실천적 의지가 담겨있다. 어떤 여성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여자랑 노는 게 재밌어서, 남성과의 유대를 끊어내고 싶어서 레즈비언이 된 세 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에게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자.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여성을 사랑하기까지 / 가인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내가 여자라는 자각이 별로 없었다. 그것과 관계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치마나 분홍색, 인형놀이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여아에게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것들을 원치 않았을 뿐인데, 나는 점점 특이한 아이가 되었다. 흔히 말하는 ‘보이시한’ 여자애가 된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남자애같다는 말을 듣다 보니 그 말에도 익숙해졌다. 어느새 스스로도 나는 남자가 되고 싶은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여자애 취급’ 받기를 싫어하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같은 반 여자애를 좋아하고 그 애와 연애를 하게 된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지만,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와 연애한다는 것은 엄청난 비밀이었다. 왠지 모르게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알고는 있었지만 스스로를, 우리를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레즈비언과 나 사이에 선을 그은 것이다. 신기해 보이겠지만, 낙인을 향한 두려움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퀴어 이론과 트랜스젠더리즘을 접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내 눈길을 끈 것은 다른 게 아닌 다양한 성 정체성을 정리한 표였다. 타고난 성별과 내가 인식하는 성별이 다를 수 있다고? 내가 트랜스젠더라고?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듯 내 삶의 조각들이 앞뒤로 들어맞았다. 여자 남자로 나누어 줄을 설 때처럼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마다 느끼던 이질감, “여자다웠”던 적이 없는 내 취향과 행동들, 남자애 같다는 말을 듣고, 또 남자가 되고 싶어 하던 나, 그리고 어릴 때부터 여자를 좋아해온 것까지 말이다. 그렇게 나는 점차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였다. 때로는 성 정체성을 나열한 표 안에서도 더 내 마음에 와닿는 다른 이름들로 나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다 페미니즘을 알아가면서 트랜스젠더리즘에 관한 수많은 논쟁을 마주했다. 처음에는 엄청난 반발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페미니스트가 된 이상 여성 의제를 외면하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불편한 논쟁을 계속 읽어나가고 페미니즘에 관한 내 생각이 차츰 자리를 잡아갈수록 내가 그저 사회적 여성성을 거부해왔을 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여자’답지 않게 꾸미지도 않고, 목소리가 크고, 여자를 좋아하는 내가 알고 보니 남자였거나 남성성을 지녔던 게 아니라,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여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