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모제인 Jan 12. 2024

갑으로 15년 살아보니 알게 된 것

이제는 프리랜서로

'프로 갑'으로 15년을 살았다.


프로 갑은 회사를 대신해서 제품을 고르고 돈을 쓰는 사람이다. 소비자로서 개인 돈을 쓰는 것과 회사 돈을 쓰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물건을 잘 고르는 능력으로 밥벌이를 하는 것이니까. 직장 초년 때는 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여느 치열한 직장생활과 같았다. 내 업을 깨달은 건 10년 정도 지나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보다 더 치열한 '프로 을'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확장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아들아,

이왕 직장생활을 할 거면 프로 갑으로 살아라.

하지만 을의 정신은 잃지 말아라.


아들이 장래희망에 '회사원'이라고 적어온 걸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그래도 사회 초년 때는 조직의 울타리를 경험해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왕 회사원이 될 거라면 내 아들이 프로 갑이 되기를 바란다. 아니면 회사를 만들거나. 하지만 절대 거기에 익숙해지지 말거라. 직장인의 본질은 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갑이 자리가 주는 외부동력으로 움직인다면,

을은 실력이 주는 자가발전으로 움직인다.


15년 동안 프로 갑으로 살면서 나는 내가 을(직장인)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을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함도 잊었다. 내가 집행할 수 있는 예산의 힘으로 움직이는 외부동력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회사돈의 힘으로 내가 직접 만들지 못하는 '유형의 제품'을 샀고, 프로 을이 제공하는 '무형의 서비스'를 누렸다. 일년에 수백억을 쓰는 대기업 예산 담당자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내가 아닌 것이 진짜 나라고 믿게 하기에 충분했다. 회사의 네임밸류와 경제상황에 따라 똑같은 회사 주식이 하루만에 몇 십 프로씩 폭등하는 것처럼, 직장인으로서 나의 지위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회사의 시황이 급격히 좋아지고 회사의 투자여력이 커져 갈수록, 프로 갑 세계에서 내가 누리는 것에도 거품이 끼어간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외부동력을 내부동력으로 바꾸는 일. 

오랜 직장 생활자의 삶이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이 바로 이 것 아닐까. "회사에서의 나"와 "직장이름을 뗀 나"의 괴리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져버린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어 버리는 순간.


이제는 안다.

프리랜서인 나는 이제 '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예전에 나에게 무언가를 팔기 위해 치열하게 영업을 하던 '프로 을'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되서 다행이다. 나는 외부동력보다 내 안에 끓어오르는 열정을 발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직장생활은 퇴사라는 끝이 있지만 직업생활은 졸업이 없다.


내 일상이 되어도 좋은 평생의 업()을 찾아서 나는 정말 행운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