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s Lisa Sep 21. 2023

다시 이곳, JFK 공항

하와이 출발

1999년 크리스마스이브, 처음 미국에 나 홀로 입국했던 JFK공항에 와 있다. 교통 정체 없어도 우리 집에서 차로 4시간이 족히 걸리는데 우연히 이곳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미리 계획했던 동부 대학교 투어 겸 가족여행을 마치고, 남편은 우리를 공항에 내려주고 집으로 향한다. 나와 아이들과 하와이에 가기 위해 아침부터 탑승을 기다린다.


우리는 도합 3주간 집을 나와 여행하지만, 각자 크지 않은 기내 수화물용 가방 하나와 작은 휴대용 가방 하나씩 단출하다. 다른 이들은 놀고먹고 명품 쇼핑하기에 좋은 천국 같은 휴양지 하와이로 멋지게 꾸미고 떠나겠지만 우리는 집에서 입던 차림으로 동네 산책하듯이 떠난다. 원시의 섬으로.


유럽에서 잘 차려입던 학생들도 미국 학교에 일주일만 등교하면 365일 운동복 차림이 된다는 미국식 스타일의 남자아이들은 어쩌면 당연하겠다. 더욱이 엄마인 내가 신경 써서 옷 사 입히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이고 아이들이 맘대로 사 입는 우리 아들들의 몰골은 미국에서도 눈에 띄게 어수선하다.


중년의 나 또한 그런 아이들과 조화롭다.  활동하기 좋은 얇은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평상복 몇 벌과 높은 산에 올라갈 때 입을 두꺼운 겉옷까지 열 벌만을 챙겼다. 보름간의 여행동안 사용할 기초화장품 선스크린 운동화 모자 수영복같이 꼭 필요한 것과 자잘한 것들을 다 넣어도 작은 캐리어가 여유롭다. 오랜만에 반가운 JFK공항을 둘러본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 타는 야간 국제선기는 참을 수 없이 추웠다. 그래서인지 불안 때문인지 15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내내 떨었다. 티브이에서 봤던 맨해튼의 스카이라인, 고층빌딩이 뿜어내는 화려한 네온사인, 크리스마스 조명까지 합세한 뉴욕을 향해 타고 있는 비행기가 급하강하며 도시로 달려들 때 나의 두려움은 증폭되어 귀가 찢어지듯 아프고 숨도 쉴 수 없었다.


그때는 외국인 자체가 낯설었다. 영어도 못해서 출입국 심사원에게 계속 똑같은 말만 반복했던 것 같다. "travel travel travel" 그 당시 불법체류하는 여대생들이 많아 가족 친지 방문 혹은 장기여행자는 주의 대상이라고 들었다. 겨울방학 두 달 여행 계획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주의를 받은 터였다. 잘못 보이면 그대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태워질지 모른다니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하고 생소했다. 


나의 홀로 하는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초조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미국에 첫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미국의 국제공항, 그것도 세계적인 뉴욕의 JFK 공항은 특별하지 않았다. 한국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보다도 작고 초라한 가짜 나무에 응원술을 연결한 것 같은 싸구려 플라스틱 장식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정말 뉴욕이 도착한 것이 맞나 싶었다.


거대한 미국인들이 전반적으로 무채색의 옷을 입고 성큼성큼 빠르게 지나갔다. 그들이 흘리고 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웅성임에 더 불안이 고조됐다. 친절한 누군가가 얼어있는 내게 다가와 질문이라도 하면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마중 나오기로 한 엄마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두 시간쯤 기다렸을까. 이미 혼자 국제고아가 되어 패닉상태가 되었을 때 엄마와 동생과 같이 출입구에 들어섰다.


24년의 흘렸다. 여전히 미국에서 나는 이방인이다. 하지만 이곳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아이들을 낳고 키운 내 삶의 터전이 되어 긴장감 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 뒤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보인다. 뉴욕의 공항은 그간 변한 것이 별로 없이 없다. 여전히 후줄근하고 덩치만 큰 회색빛 건물. 그때나 지금이나 검정 옷을 주로 입는 뉴요커들의 빠른 걸음으로 바쁘게 지나간다.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것이 그때와 비슷하다. 나만 20대의 발랄한 생명력을 잃고 아이들의 엄마로 변해있다. 비행기 탑승전, 팔다리를 흔들며 마지막 스트레칭을 요란하게 해 본다. 아이들의 간식거리도 사고 약해진 방광이 못 미더워 또 한 번 화장실에 들른다. 다시 앉아 작은 슈트케이스에 다리를 올리고 창 밖을 내다본다.


아이들을 밀어내고 오늘은 내가 창가석에 앉는다. 비행기 창문 커버를 올리고 창밖을 내다본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비추는 선명한 하얀 줄과 노란 줄이 거대한 현대미술처럼 다가온다. 비행기가 천천히 속도를 올린다. 푸른 하늘에 듬성듬성 떠다니는 하얀 구름, 찬란한 아침 태양이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부신다. 대서양 어귀와 마주한 쭉 뻗은 활주로 위로 강력한 엔진의 소음을 뿜으며 기체가 날아오른다.


내 마음도 같이 떠오른다. 아침 비행기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이곳은 내 기억과 많이 다르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아닌 녹지대, 가정집들, 그사이에 놓인 한가로운 도로, 낮은 건물들 그리고 대서양이 펼쳐진다. 진한 남색 바다에 하얀 물감을 올려 그러데이션을 만들어 놓은 듯한 하늘 위에 다다른다. 평소 이륙할 때와 다르게 귀도 편하고 마음도 편안하다. 아니 여행 가는 들뜬 마음에 가슴이 뛴다.


항상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던 구름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다. 유난히 낮게 깔린 구름이 이곳에서도 여전히 멀게 느껴진다. 결혼 전 미국 대륙을 차로 가로지르며 이곳에 살아야겠다 감동하던 그 대지를 하늘에서 다시 마주한다. 그렇다 난 이곳의 대자연에 매료되었었다. 난 이곳에서 그 마음으로 살아왔나?


무엇 때문인지 시려오는 눈을 돌려 챙겨 온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꺼낸다. 영국에서 존경받는 집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집사로써의 전문성과 품위를 지키며 살아온 주인공 스티븐스는 중년에 처음으로 주인의 저택 달링턴 홀을 떠나 자동차 여행을 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유능한 집사'가 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거세하고 살아온 그가 떠내 보냈던 동료 켄턴 양을 만나러 떠난다. 훌륭한 집사가 되기 위해 살아오면 타협하고 포기했던 것들 중 가장 아쉬운 것은 그녀와의 추억일 듯하다. 아마도 그의 유일한 아련함 사랑이었던 것 같다. 스티븐스가 주인과 그의 성을 잘 보필하고 관리하기 위해 충직하게 살듯 나 역시 좋은 배필 기도하는 엄마 지혜로운 여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가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도 몰라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모방할 때가 있었다. 성경에는 스티븐슨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정을 잘 지키는 것이 신이 주신 삶의 소명임을 잘 설명한다. 성공적으로 수행한 훌륭한 여인들과 그렇지 못한 불충실하지 이들의 예시들이 많이 나와있다. 친절하고 자세한 지침이 가득 담긴 잠언과 시편을 매일 읽으며 새벽부터 말씀을 묵상했다.


특별하게 다가오는 말씀 안에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목록을 만들어 그날 하루만큼은 지켜보려 노력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리스트는 아니다. 딱 하루만, 남편 째려보지 않기 밥상에서 딴짓하는 아들 참아내기 시부모 흉보지 않기 뭐 그런 유치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것들까지 억압하며 '자기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여인', 스티븐스처럼 '품위 있는 집사'가 되고자 애를 썼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스티븐스처럼  품위 있는 집사가 되지는 못되었다. 바보같이 떠나보낼 사랑은 없었다. 하지만 그처럼 내가 집에 없으면 큰일이라도 날듯 집을 비우지 못하고 소소한 꿈과 기회는 흘려보냈다. 왜 그랬을까?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아이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가는 창공.


창가에 기대어 구름아래 저 아래, 내가 마음을 빼앗기었던 아름다운 산과  광활한 대지를 바라본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무릎에 얹고 나의 지나온 나날들을 돌아본다. 이제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다. 아직 다섯 시간을 더 가야 한다. 이제 창문을 내리고 눈을 감아야겠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한 나를 쉬게 해 줘야겠다. 내일을 위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