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기적은 있다 (3)
“행님요, 이 할매가 얼라 좀 보자 하는데요. 근데 할매요, 머할라꼬 그랍니까? 지금 여기 좋은 기분 아닙니데이.”
낫을 든 동생의 엄포에도 할머니는 아랑곳없었다. 자신은 건넛마을 너른골, 평곡平谷에서 왔다고 했다. 지난 사나흘 동안 꿈속에서 우리 마을이 자꾸만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침술사라며 이 집에 아픈 아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침이라도 놓아줄까 싶어 왔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내도 마침 아기의 묏자리를 보러 배낭골로 올라가고 없었다.
동생과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아들을 평곡 할머니에게 안겨 주었다. 할머니가 아들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이리저리 보더니 여기저기 침을 놓는 것 같았다.
한 시간 즈음이나 지났을까? 할머니가 한참 만에 몸을 일으켰다. 숨을 고르며 침구針具를 챙긴 다음, 평곡 할머니가 우리에게 그랬다.
“아기 엄마가 오면 젖을 물려보소. 단박에 젖을 빨면 살아날 끼고, 아니면 정말로 오늘 밤에는 저 세상 보낼 운명이니까네.”
젖? 젖을 빨았으면 애당초 이렇게 되지도 않았소. 삼칠일 이후로 아들은 아내의 젖을 한 번도 입에 물지 못했다. 입술에 겨우 적셔주는 물로 억지 연명을 해 왔는데 젖은 무슨 젖. 그냥 닥치고 빨리 가소, 하는 소리가 나오려 했다. 그래도 고생했단 인사를 해서 돌려보냈다.
저녁이 되자 배낭골에서 먼저 내려온 동생이 귓속말로 땅을 파두었다고 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기력이 빠져버린 어머니 뒤로 아내가 휘청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막내 동생이 오후에 있던 평곡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동생에게 타박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눈빛이 달라졌다. 서둘러 아들을 안고 아랫방으로 들어갔다.
조마조마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그리고 가장 간절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아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진정 처음으로 듣는 크고 우렁찬 아내의 목소리였다.
“어, 어무이요. 얼라가 젖을 빱니더. 어무이.”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아들을 안고 평곡 할머니를 찾아갔다.
부엌에서 밥을 짓던 할머니가 우리를 알아보고 반겼다. 할머니는 내가 내민 돈을 한사코 거절했다. 이제 편하게 잠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하다고 했다. 밤마다 꿈에 보이던 사내아이가 다행히 어젯밤부터는 오지 않으니 그걸로 됐다고 했다. 그 말뜻을 알아차린 아내가 엎드려 또 오열했다.
평곡 할머니는 집을 나오는 우리에게 다시 신신당부했다.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아들에게 잔병치레가 많을 테니 절대 미리 걱정도 말고, 그렇다고 아예 마음도 놓지 말라고.
평곡 할머니는 그 후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났다. 자던 걸음에 운명했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평곡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사흘 동안 머물렀다. 신의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고향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들은 젖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두어 달을 참았던 아들의 식탐이 대단했다. 아내가 젖몸살을 할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들 못지않게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아내와 나는 고향으로 돌아간 지 한 달 만에 또다시 부산행을 결심했다. 문자 그대로 이번에는 야반도주夜半逃走였다.
어머니가 잠든 초저녁 틈을 타서 막내 동생이 대절해 둔 택시를 타고 노량 선착장으로 갔다. 이전에 면박을 주었던 검표원이 우리를 알아보고 움찔했다. 역시 변함없는 삼등석이었지만 이번엔 아무런 문제 없이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뱃머리에 서서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막연했지만 뭔지 알 수 없는 끈끈한 덩어리가 속에서 밀고 올라왔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다시 한번 가졌던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네 식구가 전포동 루핑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이 막 밝아오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부지런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아이가 먼저 뛰어 들어가며 고함을 질렀다.
“혜자 언니야!”
쨍그랑. 사발 깨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딸을 들어 올리는 혜자의 뒤로 주인집 어머니가 맨발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1971년 양력 11월 18일 아침이었다.
평곡 할머니의 말씀대로 아들은 세 살이 될 때까지 걸음마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유아성 대상포진을 자주 앓았다. 그때마다 우리 부부는 매번 똑같은 냉가슴을 태웠다. 그처럼 병치레가 잦았지만, 아들이 살아있어 준 것만으로도 늘 감사할 뿐이었다.
아들이 첫걸음을 떼던 1974년의 어느 날, 아내는 뒤늦은 돌상을 차렸다. 그것을 보면서 오래전 결심이 다시금 떠올랐다.
"죽지 마라, 반드시 살릴 테니."
나의 다짐대로 아들은 죽지 않았고, 우리는 결국 아들을 살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