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차르트를 보고 난 날 나는 생각했어. 살리에르는 왜 그렇게 죽도록 모차르트를 미워했을까? 맞지. 모차르트는 젊은 시절 여성 편력이 심하긴 했어.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을 죽도록 미워할 순 없는 거잖아. 그래, 그냥 인정하기 싫었던 거지. 모차르트에게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거야. 자신보다 훨씬 빠르게 악보를 만들고, 장난치듯이 음표를 가지고 놀면서 마음속에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방출해내는 게 그렇게도 꼴 보기 싫었던 거야. 모차르트는 사실 스스로 괴로워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말야. 그래서 그는, 사신으로 분장까지 하고 죽어가는 모차르트를 그토록 괴롭혔던 거야. 물론, 옛날이야기라는 것은 자주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나는 영화에 나온 모든 이야기들을 다 믿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작품으로까지 만들어졌다는 건. 적어도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죽도록 미워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인 거지.
있잖아. 나는 원초적인 것들이 싫어. 주로 본능에 가까운 것들 말야. 물론 나도 이 ‘질투’라는 감정을 가졌던 적이 있어. 그렇지만, 나는 이 이상한 감정이 말이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감정이, 결국 나를 갉아먹는다는 기괴한 사실을 발견했거든. 아주아주, 조용히 귀를 열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이 감정이 사실은 아주 자그마한 씨앗에서 자라났다는 걸 알게 돼. 그 씨앗의 이름이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답이 나와.
바로 ‘결핍’이라는 것이지.
억지로 웃기에도 벅찼던 나날들이 있어. 자존감이 땅굴 깊이까지 떨어져 있던 때가. 나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 밉고, 너무 싫어서.
나는 자주 나라는 존재가 그냥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면 했지. 그래서일까, 자주 많은 것들을 부러워했어.
내가 부러워했던 건. 사실 생각보다 당연한 것들이었어.
진심 어린 미소, 다정한 눈빛, 따스한 위로같은 것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까지 부러워했나 싶어. 내면적인 동기가 아닌, 지나칠만큼 규범적인 것들만을 따랐어. 마음속에 생긴 텅 빈 구멍을 어쩌지 못하고, 가시적인 것들만 채워넣기에 바빴어. 그런 것들은 공기중에 흩어지는 비눗방울만큼이나 덧없는 것들인데.
엷은 미소, 마음의 여유, 자그마한 공간 같은 것들.
마음을 채운 대신에, 꽉꽉 채우지는 않고 아주 조금은 비워두었어. 누군가가 기대어 쉴 수 있는, 조막만한 편안함들 같은 걸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어서 말야.
사실, 나는 아직도 나라는 존재를 간수하는 것을 이따금씩 버거워해. 지나치게 완벽해지고 싶어 하기도, 지나치게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기도 하지.
그래도 다행인 건, 나는 이런 내가 나쁘지 않다는 거야. 그래서, 누군가를 종종 부러워는 하겠으나. 미워하고 싶진 않아.
종종 아이 같이 굴고, 철학자같이 사유하기도 해. 그래, 나는 어쩌면, 별로 재미가 없는 사람인가 봐. 좋아하는 것들만 골라서 가까이 두고 싶어 하기도,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품고 싶어 하기도 해. 그래, 어쩌면, 나는 애늙은이인가 봐.
종종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감정이 들 때면. 그냥 나와 다른 너를 바라보며 어렸던 나를 한 번 더 추억하는 습관을 들일게. 나도 부족한 점이 있고, 너도 있으니. 우리는 그러니까 사람인 거겠지.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감정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연습하다 보면 말야. 미운 감정을 미운 감정 그대로, 즐거운 마음을 즐거운 마음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로, 기쁜 마음을 기쁜 마음 그 자체로. 가만히 바라보고 쓰다듬어 주면 말야. 점점 긍정적인 마음들이 더 많이 생겨나게 되더라.
처음 울음을 터뜨렸을 때처럼 호흡하는 법부터 연습하는 거야, 아장아장 걸었을 때처럼 수천 번 넘어져 보는 거야, 무거운 책가방이 아니라 꿈이 가득 담긴 마음들을 걸머지는 거야. 그러다 보면 너는,
점점 더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알게 될 거야.
앞으로도, 지금도.
나는 이 글을 보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
봄의 문턱에 서서, 몰래 새기는 나의 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