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블루의 중성화 수술이 있는 날입니다. 블루는 성별 구분에 우여곡절이 있었기에 이번엔 소개받은 새 병원으로 방문해야 합니다.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곳인데 초행길을 어려워하는 저에게는 또 하나의 난관입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후다닥 병원 갈 준비를 합니다. 블루는 금식이지만 감자는 먹어야 하기에 몰래 따로 챙겨줍니다. 감자도 블루도 영문을 모르고 불안한 눈빛입니다. 감자는 사료를 보자 블루가 어디 있나 힐끗 보더니 이내 먹기 시작합니다.
이동장에 블루를 넣어 차에 태웠습니다. 날이 추워 길이 얼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직장인들이 출근길에 주로 사용하는 고속도로를 찍어줍니다. 저는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고속도로가 더 막힐 것 같으니까요.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했습니다. 블루는 차 안에서 연신 야옹야옹거립니다.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니 무서운 게 틀림없습니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것 마냥 진땀이 납니다. 길 찾으랴. 고양이 달래랴 정신이 없습니다.
드디어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블루를 데리고 들어가니 수의사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줍니다.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고 블루를 진찰합니다. 중성화 수술 외에 궁금한 건 없냐고 하시네요. 저는 평소 킁킁대고 콧물이 자주 나는 것에 대해 여쭈어 봅니다. 선생님은 현재 숨소리로 볼 때 알레르기 비염보다 바이러스 상기도염일 수 있다고 합니다.
블루를 맡기고 오후에 다시 오기로 합니다. 배를 열고 수술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납니다. 운전해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어머니들은 이런 마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오셨구나.
잔뜩 긴장하고, 아이를 신경 쓰며, 집에 두고 온 아이까지 걱정하는 엄마에게. 아이증상에 관한 논리 정연한 설명이란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늘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원했지요. 그런데 보호자 입장이 되어보니 병원에 가면 정신이 없어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도 헷갈립니다.
일전에 돌이 갓 지난 둘째 아이를 데리고 오신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하얀 피부, 마른 체형에 다소 공격적인 말투를 가진 그녀는 우리 병원은 처음이라며 타 소아과의 처방전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동안 아이가 기관지염을 달고 살았다며 속사포처럼 병력을 털어놓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주 아픈 거예요? 왜 거길 오래 다녔는데 낫질 않아요?
둘째니까 그렇겠죠. 아무래도 첫째 아이로부터 노출되는 게 많으니까요.
저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 어머니는 다음에 진료실을 바꿨습니다.
당시의 저는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해드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쳐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규모가 큰 병원에서 최신 장비와 검사를 동원한다 해도, 오래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순 없습니다. 아이의 상태가 위중한 것도 아니었지요.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어머니에게 필요했던 것은 힘들고 불안한 마음에 대한 공감이었습니다.
그동안 아이가 자주 아파서 참 힘드셨겠네요.
이렇게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면 어땠을까요?
진료시간이 짧아서 여유가 없었다면 다른 말씀을 끊더라도 그 말을 먼저 해 드렸으면 좋았을 걸요. 제가 오늘 보호자의 입장이 되어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Chat GPT라는 AI가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글쓰기를 아주 빠르고 그럴듯하게 잘한다고 합니다. 저도 사용해 보았습니다. 인간이 AI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까 그 상황에서 지식만 전달하느냐, 혹은 상대의 표정과 말투를 읽고 공감의 말을 먼저 건네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물론 의사도 지식을 전달하고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지만 공감의 말이 우선되어야 관계를 맺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수년간 저는 '의사로서 제가 하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필요한 의학지식을 전달하고 약을 처방하고 응급 또는 심층진료가 필요한 아이들을 선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병원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가 관계를 맺는 곳입니다. 일방적으로 지식과 행위를 전달하는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주로 하는 일이 관계를 맺는 것이고, 관계에는 공감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블루를 데리러 갑니다. 고양이도, 사람도 공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여유로운 진료환경을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