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으로 얼룩지고 있는 가슴 아픈 현대사
이제는 그 시작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생각보다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해결은 요원합니다. 수차례 이를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음에도 문제는 더욱 커져버렸습니다. 과거보다 더 많은 피해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이미 오염된 커뮤니케이션으로 인한 온라인 범죄는 일상이 됐습니다. 일반으로까지 확장된 만큼 극소수의 누군가에게만 해당됐던 그때의 범죄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당할 수 있는 위협입니다.
과연 악플이 문제로써 대두된 건 언제부터일까요? 알게 모르게 부정적인 대화 양상은 이어져왔겠지만, 포털사이트와 댓글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부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중에게 각인된 첫 피해는 연예계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포털사이트 영향력이 커지고, 그곳에 실린 기사를 보는 게 현대인의 일상이 됐습니다. 이때부터 연예인들은 자신의 기사에 달린 대중의 소리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각자의 행보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는 건 연예인 개인과 소속사에겐 필수적인 부분이니까요.
기존에 없던 소통 방식이었던 만큼 연예인들은 댓글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2000년대 후반부터 과도한 '비난'에 노출된 피해자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의 시도했을 테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도 잦았죠.
고(故) 최진실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 이전에도 피해자는 있었습니다. 아역배우 출신 가수였던 고(故) 유니가 그 주인공입니다.
1996년 아역배우로 데뷔한 뒤 인기를 얻었던 유니는 2003년부터 솔로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파격적인 의상과 무대 연출로 주목을 받았던 탓일까요. 유니는 댓글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고,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2007년 1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여러 모로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악플의 영향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아왔던 그녀의 가족사가 더 그랬습니다.
이후로는 우리가 알다시피 무수한 피해자가 발생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물이 악플이 저지른 무차별한 공격의 희생양이 됐죠. 한 때 많은 이의 부러움을 샀고, 찬사를 받았던 이들입니다.
집필 과정에서 만났던 몇몇 연예계 관계자들은 악플 그 자체보다는 연예계에서 활동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인 불안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심리적인 위태로움에 악플이 부채질을 하는 양상인 거죠. 언어의 힘을 고려했을 때 내적 위태로움을 가중시키는 매개로 악플이 충분히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희생된 이들에겐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 그들은 익명의 살인자에게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유와 근거 없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경제적 상황, 신분, 외모 등 어느 것 하나도 악플을 이끌어낼 계기가 될 순 없죠.
그럼에도 그들은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대응을 하거나 울분을 토하지도 못하고 아스라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지금과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이전에는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법적 조치는 그들의 선택지가 아니었습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몇몇 연예인들이 악플러들을 고소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여의치 않습니다. 당시에는 자칫 과도한 대응으로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공공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감내하다 쌓인 스트레스를 토해내지 못하고 떠난 이들이 많습니다.
둘, 태생적으로 버티기 어려운 성향이었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타고날 때부터 외부의 요인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공격이나 자극에도 적응하거나 버텨낼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들이 연예계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이 치열한 경쟁이 끊이지 않는 연예계에서 버텨내고, 자신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린다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장해 내면이 단단해질 수도 있지만, 정상에 도달하면서 속이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황장애와 같은 질환이 그 과정에서 떠안게 되는 상처라 할 수 있죠. 경쟁자가 더 관심을 끌거나 자칫 사소한 실수로 언제든지 인기를 잃고 잊힐 수 있는 가혹한 생태계. 연예계에서 살아가면서 이 불안감은 쉽게 끊어내기 어렵습니다.
이를 잘 이겨냈다고 하더라도 악플의 무자비한 공격을 온전히 견뎌내기까지 하라는 건 상당히 버거운 일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반복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무리 심리적으로 안정된 사람이더라도 계속된 비난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가혹한 공격을 받아들인다 한들 시나브로 더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걸 이겨내면서 꾸준하게 활동을 이어오는 연예인도 있습니다. 이들을 보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하곤 합니다. '이들과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만 연예인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
반박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지만 그래도 답해보겠습니다. 그 누구도 얼마나 힘들지는 예상할 수 없습니다.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일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자신이 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 예측할 수 없겠죠.
또한 예상 혹은 분석을 통해 도출한 두려움의 크기보다 꿈에 대한 간절함이 크다면 그 길을 포기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인간은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걸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셋째, 악플을 매개로 피해자에게 일정 영향을 끼친 악플러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유가족들에게는 이 점이 가장 뼈아플지도 모를 일입니다.
악플이 떠난 이들에게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평상시의 행보나 유서 등이 그나마 근거로 볼 수 있겠지만, 특정 악플러 ‘000’의 ‘000’라는 글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연결 짓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실질적인 위해를 가한 건 아니기 때문이죠.
공격을 당하는 자들에게 쏟아지는 악플은 각양각색이겠지만, 감정을 격하게 촉발시키는 무언가는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속된 비난도 그 양상이 유사하다면 최소한 적응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는 역치를 넘어서는 치명적인 것들도 섞여있습니다. 해당 글을 적은 이에게는 마땅히 법적 응징이 이뤄졌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현재로선 뾰족한 대안을 찾기 어렵습니다.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 정도를 정확히 측정해 그에 준하는 처벌을 하기가 난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제한을 핑계로 범죄를 좌시해왔기에 지금의 사태까지 커진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일부 연예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평범한 누군가에게까지 그 마수를 뻗고 있으니 말이죠.
한 개인에게나, 사회적으로나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악플. 이제는 합리적이면서도 단호한 응징을 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