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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롱피치 Jun 08. 2023

할아버지의 농사일기

죽음과 환생. 글로 깨닫다.







"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다."



-김영하














할아버지의 기록을 보면 20년 전에도 감사의 힘을 알고 계셨다. 남들이 보기엔 너무나 하찮은 농사일에도 매일의 기상상태를 남겼고, 똑같은 일상임에도 할아버지는 모든 기록으로 그날을 증명하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책을 아주 좋아하는 농부였고 늘 읽고 기록했으며 생각하면서 사셨다.

남들이 말하면 고작 일개 농부가 이렇게까지 할 일이냐고 놀랄 만큼.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와 한국에서 동사무소 공무원과 경찰을 하기도 했지만 청력이 좋지 않아 그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하면서 늘 책을 손에 놓지 않으셨는데 손녀인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하니 그런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그가 평생을 읽었던 책은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


갑자기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나는 시골에 가서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줄줄이 달고 시골에 가서 할아버지가 생전 혼자 지내던 별채로 향했다.  그리고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있는 책들을 발견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 책장의 책들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방치되었던 책들을 보니 가슴이 떨렸다. 반가웠다. 먼지가 쌓여있기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쓴 노트는 어제 쓴 글처럼 깨끗해서 신기하기도 했다.







돌아가신 지 이미 20년이 지났지만 안경을 쓰고 한 손에는 펜을 들고 책을 읽는 할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의 외모는 나와 많이 닮아있다. 내가 갑자기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깊은 기억 속에 항상 독서를 하는 할아버지 모습 덕분인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컴퓨터며, 영어 책을 사서 공부를 하셨고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자라인지 삶이 다하기 직전까지 공부하고 책을 읽고 사는 것이 나의 인생 목표가 되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조금 더 보태자면 늘 구부정한 자세로 늘 연필이나 펜으로 줄을 그으면서 책을 보셨다.  명절에 식사를 하고 먹고 나면 이런저런 역사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이 조금 지겨웠던 기억이 난다.



청력이 좋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노년에 좁은 방구석에서 매일 책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을 하고 계셨다. 책장을 살펴보니 책 외에 할아버지의 생각을 담은 글과 농사일기가 수십 권에 달했다. 빽빽하게 적힌 노트를 보면서 20년 훨씬 지난날, 그날의 할아버지를 추억하게 됐다. 20년이 지나 고등학생이던 손녀가 아줌마가 되고, '할아버지는 이러한 삶을 사셨구나. ' 하며 그 흔적을 발견하면서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된다.


만약에 할아버지가 이런 기록을 남겨 놓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그를 이렇게 깊이 기억할 수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나는 책과 노트로 할아버지를 다시 기억해냈고 그의 내면의 이야기와 인생을 들었다. 그리고 그를 향한 그리움이 짙어졌다.



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다.  

훗날,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글을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읽고 나를 그리워할  있기를. 나의 글을 보면서 내가 없음을 위로받을  있기를. 가족들이 나와 함께했던 날들을 추억하면서 나란 존재가 글로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다.   글은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바로 글의 힘이라 생각한다.


할아버지를 통해서 나는 내가 꼭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고 글 쓰기의 정확한 목적과 목표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단 한 번도 그 누구의 꿈에 나타나지 않으셨다고, 그래서 분명히 좋은 곳으로 다시 환생하셨을 거라고.  죽어서 좋은 곳에 간 영혼들은 그 누구의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 할아버지는 생전 못했던 공부를 원 없이 하기 위해 부유한 집에 책을 좋아하는 똑똑한 아이로 다시 태어나셨을 것이다. 전생처럼 청력장애로 고통받지도 않고.

나는 할아버지 덕분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환생에 대해 더욱 믿고 싶어 졌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좁은 방에서 좁은 혼자만의 세계를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큰 세계와 사상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  오늘은 그런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고 그립고 단 하루만이라도 할아버지와 책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간절하게 나누고 싶다.

그리고 할아버지 덕분에 내가 잘 살 수 있게 됐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늘 할아버지의 손에 들고 있었던 책이 내 내면에 있던 그 무언가를 꺼내주었다.


아니, 우울증 걸려서 죽어가던 손녀를 죽지 말라고, 책으로 용기 내어 살아보라고, 할아버지가 아끼고 아낀 그것을 나에게 보내 준거라 믿는다. 내가 책으로 이렇게 살아가게 된 것도 할아버지께서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신 것이다. 그 좋은 방향이 책이고 책으로 할아버지가 나를 살려준거라 생각한다.



늘 할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을 안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려고 한다.




일기 속 내용처럼 늘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제 할아버지여서 감사합니다.

보고 싶어요. 많이.







어찌나 세월이 빨리 가는지 참 놀라울 일이다. 어제가 소설철이다. 날이 조금이라도 궂어지면 비대신 눈이 내린다는 시기가 왔다는 징조다. 점점 날씨와 온도가 내려가고 추위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는 것이 실로 자연 가운데 섞이는 것이다.  앞대는 이 추위를 지탱하는 것이 어려웠으니 참 무섭고 놀라운 한철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추위에 이겨낸다는 것이 참으로 쉬워졌는데 옷가지와 음식이 많아서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이 세상을 타계한 그 고생한 옛날 사람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고맙고 감사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1999.11.23.

김덕의 (1927-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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