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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리터리맘 Mar 01. 2021

화장실에서 유축을 하고, 밤을 새워 젖을 물려

(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출산을 했다고 곧바로 몸 상태가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았지만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당직근무를 비롯한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을 가감 없이 정상적으로 해낼 것이라고 결심했다. 많은 동료들이 나의 출산휴가 복귀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 위치를 찾은 나는 그동안의 공백을 만회해보려고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근무했다.


사실 출산 후 50여 일간 휴가를 보내면서 산후조리를 하지는 못했다. 돈이 아까워 산후조리원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곧잘 퇴원한 나는 내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곧 출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휴가 동안만이라도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출근 후 양육을 도와주실 시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에 출근 전까지만이라도 내가 오롯이 아이를 돌보는 게 도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경력단절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출산휴가 외 별도 휴식기간 없이 복귀를 하여 몸이 힘든 가운데에서 또 한 가지 욕심을 부렸다. 적어도 1년은 모유를 먹이겠다는 것이었다. 퇴근 후에는 가능했지만 근무 중에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끝에 유축기를 구입했다. 직장에서 유축을 해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집으로 가져다 놓으면 주간에 시부모님께서 냉동된 모유를 녹여 아이에게 먹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짐작하겠지만 제때에 젖을 짜주지 않으면 엄청난 통증이 있고 젖몸살을 하게 된다. 젖몸살이 산통보다 더 아프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고통이 심하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유축을 제대로 못하면 젖이 겉옷 밖으로 새어 나오고, 그런 현상이  지속되면 젖의 양도 점점 줄어들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일부는 남아서 응고되어 염증이 생기고 열이 나는 젖몸살을 앓게 된다. 음식도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다. 맵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그 모유를 먹은 아기가 탈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어려움에도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절대 다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과 나중에 후회될 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군대 내에 여성이 필요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편의시설은 고사하고 화장실도 별도로 되어 있지 않아 남자 화장실 중 한 칸을 구분해서 쓰는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불가피하게 화장실에 앉아서 유축을 했다. 그마저도 유축하는 소리가 밖으로 세어 나갈까 봐 유축기를 수건으로 둘러싸야했다. 퇴근 후 밤에는 2~3시간 단위로 젖을 먹여야 하다 보니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거의 매일 침대 곁에 기대고 앉아 아기에게 젖을 먹이다 앉아서 잠이 들고 깨기를 반복했다. 날이 갈수록 피곤이 쌓이고 몸은 점점 야위어 갔다.


덕분에 첫 아이 임신과 함께 30KG 정도 늘어났던 체중이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체중이 줄어드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급작스런 체중감소로 인해 몸에 기력이 없어지고 피곤함이 심해졌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어려운 상황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사람이 없었다. 부대에 여자라고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고, 또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했다.


당직근무 때에는 애기를 직장으로 데려와 젖을 물린 적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업무 일정이 항상 계획된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제시간에 유축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니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요즘 분유도 좋은데 꼭 모유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지만 지금 아니면 못하는 것, 아기에게 이 시기의 모유는 평생의 면역력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직장과 나의 피곤함을 이유로 포기하기 것은 엄마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차마 끊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모유의 양이 줄어가고 있었지만 힘겹게 모유수유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부대의 수검 일정을 앞두고 준비할 것이 많아 야근과 이른 출근을 반복하였다. 사실 몸이 너무 힘들었다. 몸 상태가 나빠진 징후가 역력했지만 무시했다. 수검 준비는 잘 되었고, 이제 잘 받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수검을 주도해서 받아야 하는 직책에 있는 내게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나는 출산으로 인한 공백으로 힘들었던 부대에 보답을 하고 싶었다.


수검이 시작되었다.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첫날 직무에 대한 평가가 있었다. 이 또한 준비를 열심히 하였고 만점을 받았다. 그리고 부대 행정 및 예산 등에 대한 수검이 이어졌다. 그렇게 1일 차 수검을 마치고 2일 차가 되었다. 몸이 너무 이상했다. 가까스로 출근해 책상에 앉아 있는데 몸에서 열이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40도에 육박하며 불덩이처럼 변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바로 옆에 있던 동료가 나를 데리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 출산 후 회복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과로로 인해 면역력이 나빠져 고열과 함께 몸의 균형이 깨어진 것이다.


그 와중에도 내게 열나고 아픈 건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아프면 안 되었다. 수검이 끝나면 말하고 쉬려고 했다. 하루 이틀만 더 버티면 되었는데. 결국 나는 누구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밤낮없이 열심히 준비했지만 수검을 받던 중 쓰러지는 상황으로 또 지휘관에게 불충을 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에 빠져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경이었다.


출산한 지 딱 1년 만이었다. 1년간 아무런 불평도 아쉬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순간순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워킹맘’이라는 인식을 주지 않으려 버티고 버텼다. 하지만 결과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과론적으로 수검은 잘 받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나를 걱정해주고 여건을 보장해주려 마음 써 주신 지휘관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책이 되었다.


다행히도 예상보다 그리 나쁘지 않게 상황은 잘 정리되었다. 그렇게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고, 나는 조금은 더 익숙해지고 능숙한 모습으로 육아와 직장을 함께 감당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두 인생을 살아야 한다. 직장과 가정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순위를 메길 수는 없지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 나는 직장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엄마가 좀 미숙해도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지만 직장에서는 냉정한 잣대로 나를 평가할 뿐만 아니라 나의 이런저런 상황을 봐주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도 나의 힘듦을 알지 못한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서도 안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관심이 없다.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무지일 수 있지만 사실은 무관심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불가피한 일들로 주변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때는 ‘여자가 무슨 직장이냐, 여자가 잘 되면 얼마나 잘 될 거라고, 시집가서 애 잘 키우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살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았고, 그런 말을 내 앞에서 공공연히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며 발끈하겠지만 당시에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게 웬 사서 고생인지 모르겠습니다.’라며 웃어넘겨야 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 나는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마지막 모습은 보기 좋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 승전보를 올리는 것이었고, 나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끊임없이 불어넣으며 주문을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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