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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리터리맘 Mar 01. 2021

출산을 앞두고 계단에서 몇 바퀴를 굴러 떨어져

(설렘 반두려움 반엄마가 되었다.)

출산을 앞두고 계단에서 몇 바퀴를 굴러 떨어져

중대장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보직을 맡게 되었을 때 지휘관 직책을 수행하느라 미뤄두었던 2세 소식이 찾아왔다. 임신을 하면 지휘관 보직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기혼 여군들 중 많은 인원이 필수 보직을 마치고 난 후 출산을 계획하곤 했다. 당시에도 계획한 임신은 아니었다.


군 생활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나는 사실 임신을 원치 않았었다. 지휘관이 끝난 시점이어서 시기적으로도 그렇게 나쁘지 만은 않았지만 당혹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축복받아야 할 경사인데 눈앞이 막막해지며 눈물이 났다. 


사실 당시(약 13년 전)에는 여군의 임신을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론 혼자만의 생각일 수 도 있겠지만 눈치가 많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이 여성 개인의 과업으로 여겨졌던 시절이었다. 특히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신체활동이 많고, 위험성 있는 일들도 많다 보니 행동에 제약이 따르는 임신 사실을 반가워 할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하는 걱정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나는 임산부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이 싫었다. 지금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과거에는 직장 내에서 출산을 바라보는 인식이 호의적이지 않았고, 적어도 당시에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임산부는 배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제외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사회적 인식이 그렇지 않았다고 반박할지라도 적어도 여성들은 그렇게 느끼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군들도 알아서 임신과 출산의 시기를 고민하고 미루곤 했다. 이런 제한사항들로 인해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의사를 표현한 동료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달리기와 체력단련, 훈련 등 격한 신체활동이 평상시 업무이다 보니 임신 사실을 숨기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스트레스와 피로가 더해져 유산의 위기가 닥쳤고 급기야 부랴부랴 부대에 알리고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일주일간의 입원으로 업무상 여러 가지 차질이 초래되었지만, 오히려 임신으로 인해 흔들리고 불안했던 마음이 정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생각을 접고 일단 건강하게 출산을 해야 한다는 목표에만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부대(직장)에서는 임신 여군이 있으면 자유롭지 못한 신체활동과 당직근무 제외 등 부대 운영에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고, 부재 시 불가피하게 인접 동료들이 해당 여군의 과업을 대신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다 보니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을 백번도 이해하는 마음이지만, 임신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업무능력이 가려지고 군과 일에 대한 열정이 적은 것으로 비치는 일부 통념이 안타까웠다. 


임신한 것이 죄는 아니지 않으냐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지만 남군이라면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들에 본의 아니게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미안한 마음도 컸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출산 후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그동안 동료의 수고로움을 갚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조심을 했지만 출산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쯤 사고가 생기고 말았다. 첫아이 임신으로 무조건 많이 먹는 게 좋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실천한 탓에 체중이 30kg 가까이 불어나면서 유난히도 배가 많이 나왔던 탓인지 돌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디면서 몇 바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손을 짚으면 구르던 계단에서 멈출 수도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다 보니 몇 바퀴를 굴렀던 것 같다. 너무 갑작스러운 사고에 나 자신도 너무 놀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주변의 시선과 내 몸의 고통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단 한 가지 아기가 무사한지만이 염려되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료 직원이 차를 가지고 나를 데리고 올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배를 감싸 안고 있었다. 차에 앉아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에 두 가지 생각만 했다. ‘아기에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와 ‘부대에 염려를 끼쳐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긴장한 탓에 배가 뭉치면서 통증이 있었지만 배를 쓰다듬으며 이상이 없기 만을 바랐고 아이가 대답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리 없이 부르고 또 불렀다. '기쁨아, 기쁨아, 제발..' 다행히도 내 몸의 멍자국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물론 나의 통증과 상처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 자신보다 아이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그렇게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부대의 배려와 평탄치 않은 시간을 넘어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며 엄마 여군으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출산휴가를 마치고 시부모님께 양육을 지원받으며 화려한 컴백(복직)을 했다. 군 생활을 시작한 지 7년, 새로운 보직을 받을 때마다 처음 같은 마음가짐이 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이를 두고 출근길에 나서는 것이 힘들어 '캥거루처럼 배 속에 아기를 넣고 다니며 키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백 번도 넘게 했던 것 같다. 


앞으로 과연 어떤 일들이 생길까, 엄마로서의 삶을 예측할 수 없었던 나는 직장과 엄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 보기 좋게 성공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과 나 혼자만 생각하면 그만이던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환경일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해보지도 않고 미리 겁부터 먹지는 않으려 노력하며 밀리터리맘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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