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버린다고 가벼워지는 건 아니니까>

"빛이 보이지 않을 때,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중에서

by 구정훈


결국 그녀의 모든 것을 버렸다.


손때 묻은 머플러
오래된 사진
손가락을 감싸던 반지
함께 걷던 거리의 기억까지도,
하나씩 모두 정리하고 있었다.


흔적을 정리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사진을 지울 때
화면 속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머플러를 마지막으로 만져볼 때
익숙했던 따스함과 향기가
방 안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녀가 직접 만든 반지를 산에 묻을 때
땅에 묻혀 잊히고 싶지 않다는 반지의 비명이 오래도록 귓가에 맴돌았다.

하나씩 치워낼수록
마음도 가벼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끝내 남겨진 것은,
그녀의 자취가 아니라
그 미련을 없애기 위해 애쓰는 나 자신이었다.

지우려 할수록 감정은 반항하듯
더 또렷하게 그녀를 되살려냈다.
버린다고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지운다는 건 없앤다는 뜻이 아니다.
그 자리에는 결국, 지우려 애쓰는 내가 남았다.


기억과 감정은 버린다고 해서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워버리려 애쓸수록
더 깊고 은밀한 곳으로 숨는다.

그 흔적들을 치우면서도
결국 그 기억에 사로잡힌
나를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그 모든 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의식은 그 끝마저 기억하니까.
나는 여전히 그날의 그 현장에 있었다.


잊으려 한다는,
건 망각이 아니라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지우려 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그녀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었다.

어떤 기억은,
사라지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
남기 위해 시간을 견딘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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