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7년 겨울, 오랜만에 한국에 가는 비행기표를 끊어 놓은 상태였다.
크리스마스 휴가까지 알차게 묶어 무려 3주나 한국에 다녀오는 계획을 세워놓고 한참 들떠 있었는데, 출국을 단 2주일가량 앞둔 시점, 남편이 (무슨 촉이 왔는지) 내 영주권 카드 만료일을 한번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헉!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짜는 1월 13일인데, 내 영주권 만료일은 1월 10일이었다. 아... 딱 3일만 더 있었어도 ㅠㅠ
캐나다 영주권은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데, 만기 전에 미리 신청서를 보낸다는 걸 깜빡한 내 잘못이었다.
부랴부랴 가족한테 전화해서 상황을 알리고, 여행사에 전화해서 비행기표 변경이 가능한 지부터 알아봤다. 다행히 1월 9일 날 돌아오는 비행기에 남은 좌석이 있었다. 추가 비용도 20만 원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얘기를 전해 들은 남편이 내 표만 바꾸라고 했다. 자기는 원래 일정대로 있다가 1월 13일 날 돌아오겠다고.
엥?? 한국말도 못 하는 네가 우리 엄마 아빠랑 혼자서 며칠을 더 지내다 오겠다고?
그의 결정을 전해 들은 엄마는 마냥 좋아하셨고, 아빠는 황당해 하시며 그게 A 뜻이 맞는지 재차 물으셨다. (그럼 뭐! A가 나한테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한다는 거야 뭐야 ㅋㅋ)
"아니, 아빠, 진짜라니까. 내가 그냥 20만 원 추가로 내고 같이 돌아오자고 했는데, 괜찮대~ 그 돈 아깝게 뭐하러 내냐고. 자기는 엄빠랑 며칠 더 있다가 캐나다로 혼자 돌아오겠대 ㅋㅋㅋ"
그래서 결국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친 나는, 한국말도 못 하는 남편을 한국 엄빠 집에 놔둔 채 혼자 돌아왔다. 나 없이 잘 지낼 수 있으려나... 내심 마음이 쓰였는데, 그는 와이프 없는 처가에서 아주 재밌고 알찬 시간을 보내고 왔더라.
1. 엄마는 매일 A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 사진을 보니까 광화문, 똥 박물관 (ㅋㅋㅋ), 서울타워, 남대문시장 등엘 갔고, 엄마 친구 모임에도 데려갔다.
2. 그 둘을 내내 따라다니며 찍사 역할을 자처한 아빠는, 사진 찍는다고 한 겨울에 장갑도 못 끼고 다니다가 감기에 걸리셨다.
3. 언니는, (아무도 안 시켰는데) 한국의 술 문화(?)를 알려 주겠다며 본인 퇴근 시간에 맞춰 남편을 불러내, 곱창, 닭발, 옛날통닭, 산낙지, 육회 등 한국의 술안주를 소개하는 일을 담당했다. 술도 소주, 맥주, 막걸리 등 다양하게도 마셨더라.
(아, 참고로 언니는 중국어를 좀 할 줄 알아, 남편과는 크게 어려움 없이 대화가 된다.)
그리고 남편한테 소맥 마는 법을 알려줬다. ㅋㅋㅋㅋ
나중에 캐나다로 돌아온 그는 언니한테 전수받은 대로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일정 비율로 넣고, 숟가락을 힘 있게 팍 꽂아서 거품을 내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ㅋㅋㅋㅋ 언니야?? 이런 거 왜 가르쳐 준 거니.ㅋㅋ
덕분에 남편은 남편대로,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대로 잊지 못할 추억을 한가득 만든 시간이었다.
영주권 만료일 확인도 제대로 못 한 칠칠이 딸내미 덕분에, 돈 주고도 못 살 값진 경험을 얻은 우리 부모님. 그리고 정작 친동생이랑은 한 번도 못 가져본 술자리를 제부와 씐나게 즐긴 울 언니.ㅋㅋㅋ
아빠는 그때 그 시간이 정말 너무나 특별했다고 지금도 말씀하신다.
어휴, 그때 나 혼자 안 돌아왔음 어쩔 뻔했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