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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키승 Apr 13. 2024

개표알바 '재밌네'

열여덞 번째 꼰무원들

4월 10일은 대한민국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날입니다. 투표도 하고 놀러도 가고 한마디로 좋은 날이죠. 하지만 꼰무원들, 정확하게 말하면 기초자치단체 소속 공무원들은 그날 투표사무원으로 일하기 때문에 쉬지 못합니다. 사전투표부터 본투표, 개표까지 여기저기 투입돼서 강제알바를 하죠. 저는 이번에 개표를 맡았습니다. 개표는 처음이라 사전지식이 전혀 없어서 선관위 교육영상을 열심히 공부하고 들어갔죠. 실수하면 안 되니까요.


당일 오후 4시에 출근했습니다. 고등학교 체육관에 500명 넘는 사람이 모였네요. 개표하러 온 공무원, 개표사무원으로 지원한 일반인, 각 정당에서 나온 참관인, 선관위 관계자, 투표함 이동알바 등 각각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비장한 마음으로 모였어요. 저의 역할은 투표함을 열고 투표용지를 정당별로 분류하는 일이었어요. 1조 18명의 사람들에게 각자 역할을 부여해서 수개표를 진행하게 하는 책임감 있는 자리입니다. 이번엔 투표용지가 분류기계에 들어가지 않아(용지가 너무 길어서....) 수기로 개표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새벽 6시는 돼야 퇴근할 수 있다는 멍멍이 소리가 귀에 박힘....)


4시 50분까지 도시락을 먹고 5시부터 개표사무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일반인들은 개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오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개표절차에 대한 교육을 시켜줘야 했습니다.(선관위는 도대체 뭐 하는 걸까?) 4시 출근인데 6시가 다돼서 오는 사람, '21세기에 조선시대 방식으로 개표'한다고 불평하는 사람, 저녁 못 먹어서 배고프다고 하는 사람까지... 여기서 또 느끼네요. 참 다양한 사람이 많구나! 그래도 다행히 개표 시작 후에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잘 수행합니다. 불평불만 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꼼꼼하게 확인해 주고, 한 표라도 오차가 있으면 다시 해보자고 서로 으쌰으쌰 즐겁게 진행했어요.(반전...)


참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었는데요. 바로 정당에서 나온 '개표 참관인'들이었습니다. '참관인'은 애초에 선관위를 불신합니다. '선관위의 개표 장난질을  잡아 내겠다' 며 처음부터 선관위 직원들과 대립합니다. 언성도 높이고 말다툼도 합니다. 큰 싸움이 나지는 않았지만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대요. 에휴...


개표는 새벽 4시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4시에 첫차를 타고 집에 갔어요. 당일 출근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쉬기로 결정하고 집 근처 사우나로 향했습니다. 온탕에 들어가서 졸아보긴 처음이네요. 투표소에서 신분증 확인하고 투표용지 나눠주면서 사람상대하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개표하면서 로봇처럼 일하는 게 편합니다. 하지만 밤을 새우는 게 힘드네요.


처음 해본 개표는 생각보다 재밌었어요. 12시간 밤새서 일하고 17만원의 수당을 받습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연장수당, 휴일수당, 야간수당까지 30만 원 정도 받아야지만 공무원은 그런 거 없죠. 대체휴무가 나오긴 하지만 '휴일'에 근무했으니까 대체휴무는 당연한 거구요. 공무원 노동의 댓가는 너무도 짭짤하네요. 저녁으로 도시락, 야식으로 햄버거를 먹으면서 또 한 번 현타를 세게 맞긴 했지만 처음 해보는 경험이 신기하기도 했네요. 서로 티격태격 하는 장면을 실제로 현장에서 보니까 더욱더 정치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치에 관심 1도 없는 저는 이제 놀러나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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