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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결심을 버릴 수 있는 시간

by 서가앤필 Mar 21. 2025

"회원님 오늘 컨디션은 어떠세요?"


PT 수업 전 트레이너가 항상 묻는 질문이다. 나는 PT를 받는 날에는 운동할 컨디션을 준비해서 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가능하면 당일 날엔 속에 부대끼는 것도 잘 먹지 않고 전날엔 잠도 푹 잔다. 출장이 늦어질 것 같으면 1시간 조퇴를 쓰고서라도 집에 여유롭게 도착해 준비를 한다. 그래서 컨디션이 좋다고 말하는 편이지만 가끔 불편한 곳을 이야기할 때가 있다. 손목이 아프다. 무릎이 시리다. 조금 피곤하다 등등. 그러면 트레이너는 곧바로 운동에 돌입하지 않고 아픈 부위를 꼼꼼하게 물어본다. 


손목이 아프다고 할 때는 병원은 다녀왔는지, 언제부터 아팠는지, 아픈 느낌은 어떤지, 냉찜질은 쫌 하고 있는지 물으며 손목을 잡고 이리저리로 돌려본다. 가만히 있을 때와 돌릴 때 통증이 어떻게 다른지 묻는다. 손목 위전완근을 방향대로 꾹꾹 눌러 누르며 어느 부위를 누를 때 통증이 심한지 다시 한번 더 묻는다. 그리곤 간단한 진단을 내려준다. 전완근이 수축되어 있어서 손목을 사용할 때 피로감이 느껴질 수 있으니 자주 반대편 손으로 전완근을 결대로 마사지해 주라고 했다.   

사진 - 철곰의 블로그사진 - 철곰의 블로그


트레이너가 말한 근육 결이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 궁금해 손목과 연결된 근육 그림을 찾아보았다.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내 손으로도 직접 그려보고 싶어진다. 눈으로 확인만 하기보단 직접 그려보았을 때만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낮에 사무실에서 근무를 할 땐 수십 가지 결정을 해야 한다. 직원이 묻는 물음에 답변도 해 줘야 하고, 상사가 묻는 물음엔 현황 파악을 최대한 빠르게 해야 한다. 파악이 끝나면 A4 1장으로 보기 좋게 정리해 보고해야 한다. 근무시간에는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잠시도 신경을 없다. 보고 중에도 상황이 조금씩 바뀌거나 상사가 또 다른 의견을 첨가했을 때는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바뀔 때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은 판단인지 결정해서 다시 팀원에게 피드백을 해 줘야 한다.


무수히 많은 선택과 결정을 뒤로하고 퇴근 후 PT시간은 머리를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다. 개인 운동을 하러 갈 땐 오늘 어느 부위를 할 건지 어떤 동작으로 시작해서 어떤 동작으로 마무리를 해 줄 건지를 간단하게나마 그려줘야 하지만 PT수업은 다르다. 트레이너가 하라는 대로 몸만 움직이면 된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머리를 잠시 멈추고 몸만 쓰면 된다는 생각에 벅차기까지 한다.


결심을 버릴 수 있는 시간


1주일에 1번, PT수업을 내가 아직도 버릴 수 없는 이유다. 헬스장을 드나든 지도 4년째가 되다 보니 헬스장도 익숙해졌겠다. 기구도 다 사용할 줄 알겠다. 그냥 혼자 운동하면 되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혼자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그동안 배워 온 동작과 익숙해진 방법으로 운동하면서 2시간 정도를 채우는 건 어렵지 않다. 이 기구 저 기구 조금씩 깨작깨작. 폼롤러 위해서 스트레칭 조금, 러닝머신 위에서 유산소 운동 조금 하면 2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그렇다고 헬스장 공간이 편해진 건 아니다. 남자 회원들이 많은 헬스장은 여자 회원에겐 여전히 불편한 공간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PT 시간은 머리를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다. 트레이너가 시키는 대로 오로지 내 몸의 동작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시설이 호텔만큼 좋지 않아도, 남자 회원들이 많아서 조금 주목을 받기는 해도, 모든 단점을 초월할만큼 당분간은 더 붙잡고 가고 싶은 시간이다. 


하루 중 많은 선택과 결심에서 자유로워지는 시간. 그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온전히 트레이너가 시키는 대로 횟수를 채우고 나면 반가운 근육통을 만나게 되는 시간. 금요일 8시 PT 시간을 기다리며 평일이 바로 서고 주말마저 온전히 보내게 되는 시간. 결심을 버리고 온전해질 수 있는 시간으로 나는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관련책 - <걷는 사람, 하정우>


여기 시도 때도 없이 걷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배우 하정우다. 


난 배우 하정우를 잘 몰랐다. 잘 모르니 무관심했다.  

하지만 <걷는 사람, 하정우> 책을 보고 나서 그를 알게 되었다. 알게 되니 좋아졌다. 한 사람의 삶 속에 걷기라는 종목을 들여놓는 순간 삶이 어떻게 정돈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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