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산 지도 어느덧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사는 동안 동네 마트를 시작으로 학교, 약국, 병원, 은행, 공원, 식당, 도서관, 스포츠 센터 등등 웬만한 공공 기관 및 대중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독 많이 가 보지 않았던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미용실. 똘똘이 머리를 자르러 한 번 가 본 것이 전부였고 내 머리를 자르러 가 본 적은 없었다. 아들 머리를 자를 때 가 본 미용실은 실망감이 너무 컸다. 더 다듬어야 할 것 같은데도 이만하면 됐죠? 하는 질문을 몇 번이나 했다.
그 이후로는 이발기(일명 바리깡)를 사서 남편과 내가 직접 아들의 머리를 잘라주고 있다. 남편이 먼저 옆머리를 이발기로 밀어주고 그다음 내가 앞 머리와 윗 머리를 가위로 잘라준다. 매번 실력이 들쑥날쑥하지만 어린이 머리는 금방 자라서인지 헤어 스타일이 아주 나쁘지는 않다. 남편의 머리는 질끈 묶는 짧은 말총머리라서 내가 어깨 높이에 맞춰 직접 잘라주면 어렵지 않게 해결이 되고 있다.
아들 머리와 남편 머리는 미용실에 가지 않아도 자력으로 그럭저럭 해결이 되고 있는데 도저히 내 머리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이십 년 넘게 단발을 유지했었고 두세 달에 한 번은 미용실에 가곤 했었다. 하지만 미국 미용실은 가기가 망설여졌다. 한 번 가봤을 때 실망을 크게 한 데다가 여자 머리 커트는 더 비싸고 미국 미용사는 동양인의 검은 머릿결을 잘 못 다룬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감사하고 운이 좋게도 그동안 내 머리를 잘라 주시는 한국 분을 만날 수 있었고 가끔씩 머리를 잘라주셨다. 하지만 팬데믹 동안 거의 일 년 가까이 머리를 자르지 못하고 내 머리는 하염없이 길었다. 머리를 잘라주시는 한국 분도 만나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내 머리 스타일은 어느새 묶는 머리로 바뀌었다. 긴 머리를 빗을 때마다 예전의 단발머리가 너무 그리워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시내에서 뵌 한국 분께서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신 걸 보고 어느 미용실을 가셨는지 여쭐 수 있었다.
러시아 여자분이 미용사로 있는 시내 미용실에서 잘랐는데 한국에 비할 건 아니지만 괜찮은 솜씨라고 하셨다. 머리를 잘라야지 생각만 하고 어느 미용실에 가야 하나 고민만 하다가 아는 분의 추천을 받으니 나도 자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신 접종이 거의 이루어지면서 이곳 미국 소도시에서는 바깥에서도 마스크를 다들 안 쓰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나도 백신 주사를 2차까지 다 맞았으니 미용실에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며칠 전 전화로 예약을 하고 드디어 내 머리를 자르러 미국 미용실에 방문을 했다.
그곳에는 러시아 미용사 한 분만 계실 줄 알았는데 미용사가 두 분이나 더 계셨다. 내게 배정된 미용사는 러시아 분이 아닌 머리가 하얗고 연세가 지긋하신 미국인 아저씨. 왠지 불안한 마음에 미용사를 바꿔달라고 해야 하나? 살짝 고민을 했지만 어느새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아저씨께서는 천으로 내 어깨를 두르고 계셨다. "How would you like your haircut?" 나는 예전에 찍었던 단발머리 내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단발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동양인이 거의 없는 우리 마을. 자연스레 미용사 아저씨께서는 내게 어디에서 왔는지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반가운 얼굴로 눈을 크게 뜨시며 본인 아버지께서 한국 전쟁 무렵 한국 생활을 오래 했었다고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께서 서울과 대전에서 한동안 지내셨다며 너무 반가워하셨다. 그러곤 갑자기 "안녕하세요?" 한국어로 인사를 하셨다. 아는 한국어는 그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며 씩 미소를 지으셨다.
나도 아저씨께 질문을 드렸다. "Are you working here for a long time?" (How long have you been in the field? 좀 더 자연스러운 표현은 늘 나중에 생각이 난다.) 대답은 무려 40년! 평생을 미용사로 일을 하고 있다며 이 일을 너무 사랑한다고 하셨다. 역시나 아저씨의 미용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슥슥 싹싹 아주 능숙한 솜씨로 가위질을 하셨다. 똑 단발이 아닌 끝에 살짝 층도 내면서 내가 딱 원하는 단발 스타일을 만들어 주셨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미국 미용실에 대한 편견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 약간 불안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 괜히 죄송스럽기까지 했다.
얼마예요? 여쭈니 20불! 20불이요? 40~50불 이상은 할 것 같았는데 미용사 아저씨께서는 20불이라고 하셨다. 가격도 예상보다 훨씬 저렴했다. 팁으로 5불을 더 드리니 너무 감사하다며 개인 명함도 챙겨주셨다. 다음에도 내게 미용을 받고 싶으면 개인적으로 예약 전화를 하고 오면 된다고 하셨다. 두 번째로 가 본 미국 미용실은 완전 대만족이었다. 미용실을 나오며 생각했다. 한 번의 경험으로 평가 내리지 말 것. 남의 말만 듣고 단정 짓지 말 것.
미국에서도 맘에 드는 미용사를 찾아서 마음이 든든하다. 머리가 길면 아저씨를 또 찾아뵈어야지.